지난 5일 47대 미국 대통령을 뽑는 선거에서 민주당의 카멀라 해리스가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에게 참패를 당한 그 시각, 뉴저지주 남부 체리힐이란 동네의 한 호텔에서 시민들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한국인의 미주 이민이 시작된지 122년만에 한국계로는 최초로 상원의원에 당선된 앤디 김이 연단에 올랐다. 그는 “우리가 만든 것이 자랑스러운가요?”라고 운집한 시민들에게 묻고는 “우리가 추구하는 변화를 믿습니까, 계속 싸울 준비가 되셨나요? ”라고 또 물었다.
미국에서 연방 상원의원 한 사람이 갖는 권한과 힘의 크기는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막강하다. 주정부와 연방정부 내의 요직 가운데 상원의원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자리는 600여 개에 이른다. 상원의원 한 사람이 반대를 하면 대통령은 예산도 인사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웨스트버지니아의 조 맨친 상원의원의 반대에 부딪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법안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수정하고 또 수정해서 통과시킨 것이 좋은 예다. 대통령은 하루에 두서너 명의 상원의원과 반드시 통화를 해야 국정운영이 가능하다는 말은 상원의원의 정치적 영향력을 잘 설명해 준다. 그런 자리에 42세의 한국인 2세가 당당히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2018년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한지 만 6년 만이다.
상원의원 영향력 행사 자리만 600개 2019년 3월 앤디의 워싱턴 입성을 축하하는 첫 후원회를 의사당 부근에서 마련했다. 뉴저지에서 4시간 이상 운전하며 앤디의 아버지 김정환 박사를 모시고 가는 동안 그의 70년 인생사를 들었다. 6·25전쟁 직후부터 그는 고아였다. 10살이 안 된 어린 시절, 배고픔을 달래며 먹을 거리를 찾아 서울역 부근을 배회하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구두를 신은 신사에게 재수 없다며 발길질을 당하고 얻어맞은 그 아픈 기억을 들려주면서 이야기를 이어가질 못했고, 나도 울지 않고는 들을 수 없었다. 다행히 중증 소아마비 고아를 어느 고아원에서 받아줘 학교를 가게 되었고, 장래가 보인다고 대학에 진학한 뒤 미네소타대로 유학까지 오게 되었다. 유전공학으로 전공을 바꾼 그는 MIT 연구교수에 이어 하버드 의대 교수가 되었고, 유학 중 서울에서 간호사인 지금의 부인과 결혼을 해서 미국에서 이민가정을 꾸리게 되었다. 김 박사는 자신의 인생사를 들려주면서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 이뤄진 내 인생은 순전히 하늘이 이끌어 온 것”이라고 했다.
김 박사의 아들 앤디는 시카고대를 졸업하고 로즈 장학금으로 옥스퍼드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뒤 아프카니스탄 주둔 미군 사령관인 데이비드 페트레이어스 장군의 자문역할을 수행하면서 군사·외교 전문가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는 31살에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에 들어갔다. 2018년 뉴저지 제3지역구에서 하원의원에 도전한 앤디를 가장 적극적으로 공개 지지한 사람은 오바마 대통령과 수전 라이스 안보보좌관이었다. 그들이 소개하는 앤디의 일화가 있다. 2014년 과격 테러단체 이슬람국가(ISIS)가 쿠르드족 소수종교 교파의 야지디족을 몰살시키기 위해 이라크 북서부에서 군사작전을 개시했다. ISIS의 공격을 피해 신자르 산맥으로 도망가 물과 음식도 없이 고립된 수만 명의 생명이 위기에 몰렸다. 백악관 지도부는 ISIS 섬멸을 궁리할 뿐 야지디족의 안위에는 누구도 관심이 없었다. 그 때 하급직원(행정관급) 앤디가 데니스 맥도너 비서실장에게 수만 명의 야지디족을 살려야 한다고 긴급 상황을 설명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앤디가 작성한 보고서 초안대로 계획을 승인했다. 미군 특수부대는 먼저 야지디족에게 보급품을 공수한 다음 ISIS 무장 세력에 대한 공습을 실시했다. 라이스가 앤디를 “매우 사려 깊고 신중한 한편으로 단호함과 배짱을 갖춘 사람”이라고 평하고 하원 선거를 적극 지지한 배경에 그런 일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2018년 하원 도전부터가 단호함과 배짱의 산물이었다. 그가 출마한 뉴저지 지역구는 오랫동안 공화당 텃밭이었다. 민주당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앤디 외엔 아무도 없었다. 앤디는 두 발로 유권자들을 찾아 다니며 현안을 파악하고 지지를 호소했다. 선거 당일의 개표에선 아슬아슬하게 졌지만 일주일 뒤 부재자 투표까지 개표한 결과 박빙의 차로 뒤집기에 성공했다. 2020년 재선 때엔 7%포인트 정도로 격차를 벌렸고 2022년 3선 때엔 15%포인트 차이로 압승했다. 공화당 텃밭을 완벽하게 민주당 지역으로 만든 것이다.
상원 입성 과정은 더욱 극적이다. 2023년 뉴저지의 가장 강력한 정치인인 밥 메넨데스 연방 상원외교위원장이 자신의 영향력을 선물·현금·금괴와 교환했다는 내용의 기소장이 연방검찰에 의해 공개됐다. 앤디는 6명의 최측근 참모들을 긴급 소집해 상원에 도전할 뜻을 비췄다. 모두가 말렸다. 이미 현직 주지사 부인 태미 머피가 당의 간부들을 완벽하게 자신의 지지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승산이 없고, 수백만 달러의 선거자금을 모금하기도 쉽지 않으니 하원의원 자리를 지키자며 두 시간 동안 말렸다. 그렇게 회의를 끝낸지 한 시간 만에 앤디는 자신의 소셜미디어 계정에 직접 상원 출마를 발표했다.
뉴저지에서 선출직에 도전하려면 민주당 간부들의 허락을 받아야만 하는 선거제도가 있다. 당 간부들의 인정을 받으면 예비경선에서 투표용지에 민주당이라 적힌 칸에 이름을 올려 주고, 그렇지 못한 후보자는 ‘시베리아 투표란’으로 불릴 정도로 눈에 띄지 않는 구석자리에 표기하는 방식이다. 앤디는 이런 투표용지가 자신의 헌법상 권리를 침해했다고 주장하며 뉴저지주 각 카운티의 서기를 연방법원에 고소해 승소했다. 그 누구도 엄두를 못내던 일을 이뤄낸 쾌거였다.
나아가 앤디는 끼리끼리 권력을 나눠먹는 민주당의 기득권 정치와 부패를 뒤엎겠다고 선언했다. 뉴저지는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출신이 전·현직 주지사에 잇달아 당선되는 등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히 나도는 지역이었다. 이에 식상한 유권자들은 앤디에 열광적 지지를 보냈다. 앤디와 경쟁한 주지사 부인은 앤디보다 4배 이상의 선거자금을 모금했지만 앤디를 지지하는 일반 시민사회의 폭풍 앞에서 예비선거일까지 못가고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4년 뒤 민주당 대통령 후보군 들 듯
오늘의 앤디를 만든 결정적 장면이 하나 있다. 2021년 1월6일 트럼프 대통령은 연임에 실패한 2020년 대선 결과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고, 연방의사당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폭도들에 의해 공격당했다. 아수라장이 된 의사당 중앙홀에서 자정이 넘은 시간에 쓰레기를 치우는 한 현직 하원의원의 모습이 AP 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됐다. 사진은 전국으로 퍼졌다. “거기(의사당)를 청소하고 다시 시작해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는 앤디의 말도 함께 미국인들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전국적인 인물로 떠오른 앤디가 이번 선거에서 최초의 한인 상원의원이자 동부 해안 최초의 아시안계 상원의원의 기록을 남기게 되었다. 42세인 그는 세 번째로 어린 미 연방 상원의원이다. 그가 원한다면, 향후 수십 년간 상원의원으로 일하며 꿈을 펼칠 수 있는 교두보를 확보한 셈이다. 물론 그보다 더 훨씬 더 큰 꿈을 펼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다.
금융위기로 미국의 재정이 파탄위기에 몰렸던 2008년 버락 오바마가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일리노이에서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한지 불과 4년 만에 대통령이 됐다. 그는 2004년 존 케리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던 보스턴 전당대회에서 연설을 하면서 일약 전국적인 스타 정치인으로 떠올랐다. 오바마 대통령이 재선에 나선 2012년 노스캐롤라이나 샬롯 전당대회에서 소비자보호 운동가 출신의 리사 워렌이 연설을 했다. 워렌은 그해 매사추세츠주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했고 그로부터 4년 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출마해 서민들의 희망이 되었다. 지난 8월 시카고의 민주당 전당대회의 메인스테이지에서 연설한 ‘Andy Kim’은 이미 기득권 정치를 타파하는 개혁의 아이콘으로 전국적인 스타덤에 올랐다. 2028년 미 민주당 대통령 후보군에 KIM이란 이름자가 올라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얘기다.
김동석 미주한인유권자연대 대표. 1985년 미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마치고 1996년 한인유권자센터를 설립해 한국계 교민·교포들의 권익 향상을 위해 활동해 왔다. 2008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대선 캠프에 참여하는 등 워싱턴 정계에 인맥이 두텁다. 한·미관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