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시간에 엎드려 잔다고?”…충격 받은 40대男, 잘 다니던 직장까지 관두더니

이유진 기자(youzhen@mk.co.kr) 2024. 11. 15. 20:30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일흔의 오디오메이커’
이광일 싸이몬오디오랩 대표
기술고시 수석 출신 공무원
돌연 40대에 오디오회사 차려
60대에 회사 나와 재창업 뒤
해외 브랜드보다 싸고 튼튼한
하이엔드 스피커 ‘Z84’ 개발
유랑극단 출신 父·성악가 누이
“음악 어릴 때부터 스며들어야”
이광일 싸이몬오디오랩 대표가 본인이 수년간 개발 과정을 거쳐 선보인 스피커 ‘Z84’에 팔을 괸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주형 기자]
1980~1990년대 전축은 중산층의 필수가전이었다. 거실 중앙은 당연히 인켈이나 태광 전축 차지였다. 카세트 플레이어와 라디오를 시루떡마냥 쌓고 양 옆에 스피커를 세워야 거실이 완성됐다. 강산이 서너번은 바뀐 지금, 오디오는 더이상 필수가전이 아니다.

무선이어폰이 점령한 시대에도 어떤 사람은 집집마다 오디오를 두는 세상을 꿈꾼다. 국내 대표 오디오 메이커인 이광일 싸이몬오디오랩 대표 얘기다. 이 대표는 “음악은 많아졌는데 사람들이 품질로 듣지 않고 간편성과 휴대성으로 듣는다”며 안타까워했다.

이 대표는 공무원이었다. 경기고와 한양공대를 나와 기술고시를 수석 합격했다. 전매청(현 KT&G)에서 10년 간 공무원 생활을 했고, 이후 10년 간은 빌딩 자동화 관리 회사에서 근무했다.

이광일 싸이몬오디오랩 대표가 서울 서초동 청음실에 앉아 LP판을 바라보고 있다. 양옆에 설치된 제품이 이 대표가 수년간 개발 과정을 거쳐 선보인 스피커 ‘Z84’다. [한주형 기자]
그러던 어느날 오디오 메이커 ‘에이프릴 뮤직’을 창업했다. 수업참관차 간 아들 학교에서 음악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게 계기였다. 이 대표는 “오디오 사업을 하겠다는 꿈은 늘 있었는데, 그 장면이 트리거가 됐다”고 회상했다. 대학 선배이자 전자통신연구원(ETRI) 출신 엄태원 이사가 그의 뜻에 동참했다. 엄 이사가 설계한 오디오 시제품을 이 대표가 듣고 또 들으며 조율을 거듭했다. 1998년 창업 이후 3년 간 밤잠 안 자고 노력을 기울인 끝에 2000년 첫 제품이 나왔다.

시장 반응은 대박이었다. 영국 유명 오디오 전문지 하이파이(HI-FI)는 2002년 에이프릴뮤직가 선보인 CD플레이어에 대해 “유럽 메이커 제품이었다면 가격을 2배는 더 지불해야 했을 것”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탄력을 받은 이 대표는 일본 브랜드 ‘오라(AURA)’의 판권을 가져와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납품했다. 마크 레빈슨을 비롯한 세계 유수 오디오 메이커와 교류했다. 그러나 사업적으로는 순탄치 않았다.

결국 이 대표는 창업한 회사를 나와 2016년 ‘싸이몬오디오랩’을 다시 차렸다. 싸이몬오디오랩 제품 가격은 300만원(CD플레이어와 컨버터)~ 500만원(S3스테레오 파워앰프) 수준이다. 올인원 제품은 800만원 정도 한다. 싸도 2000만~3000만원, 비싸면 억대를 호가하는 외국 메이커 제품에 비해 낮은 가격대다. 그는 “500만원대 세트를 만들어 외국산보다 훨씬 높은 사운드 퀄리티를 경험하게 하는 것이 목표”라고 강조했다.

이광일 싸이몬오디오랩 대표가 서울 서초동 청음실에 앉아 LP판을 든 채 미소짓고 있다. [한주형 기자]
이 대표는 ‘음악은 어릴 때부터 스며야 한다’고 강조한다. “엄마 뱃속에서 태아가 소리를 듣죠. 임종 직전까지 살아있는 감각이 청각이에요.”

이 대표 부친은 이북 유랑극단에서 기타를 치던 가수였다. 집에는 일찌감치 전축이 있었다. 서울예고를 나와 성악을 공부한 큰 누나는 화장실에서 오페라를 불렀다. “누나가 맨날 들어가 노래를 불러대니 ‘왜 안 나오냐’며 6남매가 발로 화장실 문짝을 막 차댔죠. 그런데 나중에 그 노래를 다시 들으니,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며 좋더라고요. 자꾸 듣다가 스며든 거죠.”

그는 “온도를 맞춰 분유를 타듯이 음악은 부모가 아이들에게 엄선해 들려줘야 한다”며 “반드시 클래식이 아니어도 좋은 소리로 자꾸 듣다 보면 관심을 갖는 순간이 온다”고 말했다.

이 대표는 오디오 시장 성장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그는 “TV는 화질 면에서 이미 기술적인 정점에 올랐기 때문에 앞으로 갈 곳은 사운드뿐”이라고 단언했다. 글로벌 시장조사 업체 그랜드뷰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홈오디오 시장 규모는 지난해 기준 327억달러(약 45조원)으로, 오는 2030년까지 연 평균 11.5%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 대표가 수년 만에 선보인 신제품 ‘Z84’는 20년 연한인 여타 제품보다 내구성을 특히 신경을 썼다. 40~50년은 너끈히 쓸 수 있다. 이 대표는 오는 17일까지 서울 용산 드래곤시티에서 열리는 ‘오디오엑스포서울 2024’에서 Z84 등을 선보일 예정이다.

전세계 오디오 업계에서는 ‘장인’으로 명성을 날리는 이 대표지만 회사 경영은 또 다른 얘기다. 대량 생산 제품이 아니다보니 그의 이름을 믿고 수년째 제품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이 대표의 최종 목표는 ‘손맛’이 들어가 일관된 감동을 주는 소리를 내는 오디오를 만드는 것이다.

일흔의 오디오 장인은 말했다. “꾸역꾸역 여기까지 오긴 왔어요. 죽으면 죽었지, 꿈은 안 버려.”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