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는 이야기] 가죽이 익어가는 시간

2024. 11. 15.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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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에 익은 물건을 오래 쓰는 걸 좋아하는 나는 가죽 제품을 선택할 때가 많다.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가죽공방에서 파우치를 하나 주문했다.

나는 손바닥으로 손끝으로 가죽의 표면을 오래 문질렀다.

나는 서랍을 열어 가죽 에센스와 스펀지, 부드러운 천을 끄집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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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석버석한 새 가죽파우치
은은히 한갓지게 문지르자
비로소 내 손에 딱 맞아 만족
인간관계도 익는 시간 필요
찬찬히, 성실하게 다가가길

손에 익은 물건을 오래 쓰는 걸 좋아하는 나는 가죽 제품을 선택할 때가 많다. 잡다한 물건을 넣어 다니는 파우치와 필통, 선물받은 노트를 감싸고 있는 북커버와 다이어리 모두가 각각의 색과 두께를 가진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다. 소규모 공방을 둘러보다 필요에 딱 맞는 제품을 만났을 때의 기쁨이란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대부분 주문 뒤 제작되는 시스템이라 1~2주 정도의 기다림이 동반되는데, 내게는 그것마저 설레고 기껍다. 그렇게 받아 본 제품은 대부분 성실하고 꼼꼼한 바느질로 마무리돼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은 투박하고 묵직해서 좋고, 어떤 것은 간결하고 날렵해서 좋다. 가장 좋은 것은 오래 쓸수록 손때가 묻어 반들반들해지는 표면이다. 내 습관대로 정직하게 닳고 기울어진 물건을 보고 있자면 정말 '내 손에 맞는 내 것'이란 기분이 드는 것이다.

얼마 전 우연히 알게 된 가죽공방에서 파우치를 하나 주문했다. 생각보다 이르게 도착한 물건을 열어보니 어라, 뭔가 가죽의 느낌이 낯설었다. 새 물건 특유의 겉도는 느낌보다 버석버석하고 거친 느낌이 더 강했던 것이다. 나는 손바닥으로 손끝으로 가죽의 표면을 오래 문질렀다. 언젠가 햇빛 비치는 자리에 잘못 놓아두었던 가죽 연필꽂이가 꼭 이런 느낌이었다. 햇빛에 조금씩 졸아들어 부서지기 쉬운 무엇이 되어버렸던 어두운 밤색 가죽. 그때 그걸 어떻게 했더라. 나는 서랍을 열어 가죽 에센스와 스펀지, 부드러운 천을 끄집어냈다.

바세린처럼 생긴 고체 에센스에 따뜻한 입김을 불면 겉면이 느슨해진다. 소량을 묻혀 가죽 표면에 살살 펴 바른 뒤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듯 가죽을 천천히 문지르는 시간은 고요하고 평화롭다. 성급한 마음에 에센스를 처덕처덕 덧바르면 얼룩이 남는다. 지루한 마음에 적당히 문지르다 그만두면 건조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적당한 힘으로 끈기 있게 문질러야 비로소 은은한 윤기가 가죽의 표면 가득 차오르는 것이다. 버석하던 표면이 촉촉해지면 달리 더할 것이 없다. 에센스가 잘 스며들도록 그늘에 한동안 내려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가만히 가죽을 문지르고 있자니 이것이 인간관계와 꽤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면데면하게 서로를 겉돌던 사람들이 서서히 가까워지는 시간과 말이다. 처음 만난 사람과 친해지는 데에도, 오래도록 만나온 사람과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도 모두 노력이 필요하다. 성급한 다가섬이나 지나친 베풂은 서로의 마음에 얼룩을 남긴다. 너무 먼 거리에서의 방관은 서로의 마음을 건조하게 만든다. 적당한 거리에서 꾸준히, 적당한 온기를 건네는 일. 서로의 마음을 둥글게 문질러 은은한 애정이 차오르게 만드는 일. 그 지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로에게 꼭 맞는 누군가가 되는 일은 얼마나 설레는 일인가. 서로의 요철에 맞게 적당히 닳고 낡아 부드러워진 모습으로 기꺼이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은 또 얼마나.

여러모로 노력이 필요한 일. 나는 한결 매끈해진 파우치를 그늘에 내려두었다. 노력이 필요하지만 노력만으로 모든 관계가 수월해지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어떤 사람은 햇빛 같아 버겁고 어떤 사람은 장마처럼 집요하다. 어떤 관계는 나를 부서지기 쉬운 무엇으로 한없이 졸아들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갈라진 마음을 관계에서 위로받을 수 없다면 내 손을 뻗으면 될 일이다. 오래도록 문질러 온기를 채우다 보면 부드럽고 촉촉해진 내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손을 뻗을 용기를 얻게 되겠지. 그런 식으로 마음이, 관계가, 시간이 익어 갈 것이다. 이 작은 가죽이 익어 가는 것처럼 말이다.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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