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후위기, 숲이 주는 해답[정봉석의 기후환경 이야기](21)
지난 11월 1일, 태풍 ‘콩레이’의 영향으로 제주는 폭우에 휩싸였다. 200년에 한 번 올 법한 양의 비가 쏟아진 뒤, 다음 날 아침 그동안 찾아가고 싶었던 비자림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발밑의 땅은 비에 촉촉하게 젖어 푹신했고, 공기는 상쾌하고 차분했다. 아침 공기 속에는 빗방울이 남긴 고요함이 스며 있었고, 숲 곳곳은 비의 흔적을 반짝이며 빛내고 있었다. 비자나무 잎마다 맺힌 물방울이 아침 햇살에 작은 빛으로 반짝이고, 빗물에 씻긴 나무들은 더욱더 녹음이 짙어진 숲의 중심으로 나를 초대하는 듯했다.
비자림은 흔히 ‘천년의 숲’으로 불린다. 수령 800년이 넘은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빼곡히 자리 잡고 있다. 이 나무들은 한국에서 특별히 제주에서만 자생하는 희귀종이다. 주변에 떨어진 비자나무 열매를 살짝 누르면 향긋한 숲속의 냄새가 퍼진다. 그 안의 씨앗은 옛날부터 구충제로 요긴하게 쓰였다. <동의보감>에서는 “비자를 하루 7개씩 7일간 먹으면 촌충이 없어진다”는 처방을 전하고 있다. 또한 비자나무는 내구성이 좋고 아름다운 결을 지닌 목재로도 유명하다. 특히 비자나무 바둑판은 최고의 품질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뿌연 안개가 흩어지듯 숲이 서서히 시야에 드러나고, 세월의 무게를 이고 꿋꿋하게 서 있는 나무들이 주는 경외감에 압도된다. 어제의 폭우가 아무것도 아닌 듯 비자나무들은 수많은 폭풍과 계절의 변화를 견뎌내며 굵고 튼튼한 줄기를 세워 잎을 활짝 펼치고 있었다. 이 숲을 거닐며 느껴지는 경외감은 단순히 나무와 숲을 넘어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생명의 연대기에 대한 찬사로 다가왔다. 천 년을 지켜온 숲속에서, 한 세기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의 존재가 또렷해지며 자연의 본질과 영속성 앞에서 겸허해졌다.
기후위기를 막는 숲
여름 내내 이어진 폭염과 가을까지 지속한 늦더위로 올해는 관측 사상 ‘지구에서 가장 뜨거운 해’로 기록될 가능성이 있다. 산업화 이전과 비교해 평균기온 상승폭은 처음으로 ‘기후 마지노선’인 1.5도를 넘어설 전망이다. 이제 폭염, 폭우, 폭설, 태풍, 가뭄, 홍수, 한파, 대형 화재 등 이상기후가 세계 곳곳에서 일상화되고 있으며, 이러한 기후변화는 인류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비자림 같은 숲은 이러한 기후위기의 파도에 맞서는 소중한 방파제다. 산업혁명 이후 화석연료 사용이 늘면서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꾸준히 증가해 기후변화가 심화하고 있다. 숲은 기후위기를 완화하는데 중요한 자연적 탄소저장소 역할을 한다. 나무는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를 흡수해 산소를 방출하고 줄기, 가지, 잎, 뿌리에 탄소를 저장한다. 오래된 숲의 나무들은 수십 년, 수백 년 동안 탄소를 저장하며 지구의 ‘탄소 은행’ 역할을 한다.
숲의 역할은 이뿐만이 아니다. 숲은 폭염과 가뭄, 폭우와 같은 극단적인 날씨에 대해 자연의 방어선을 제공한다. 나무 그늘의 온도는 주변보다 훨씬 낮고, 나무뿌리는 빗물을 머금어 비가 자주 오지 않아도 토양을 촉촉하게 유지한다. 더운 여름날 숲에 들어서면 느껴지는 서늘한 공기로 알 수 있듯이 숲은 자연의 에어컨이자 물 저장고인 셈이다. 폭우가 쏟아질 때 숲이 토양을 단단히 붙잡아 주어 지반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땅속 깊이 뻗은 나무의 뿌리는 비가 지나간 뒤에도 수분을 유지해 지하수를 풍부하게 하고 지역 생태계의 소중한 균형을 지탱한다.
도시에 조성된 ‘도시 숲’은 열섬현상을 완화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한다. 산림청에 따르면, 도시 숲은 여름철 한낮 평균기온을 도시 중심보다 약 3∼7도 낮추고, 평균습도를 9~23% 높여 도시 열섬현상을 완화한다. 또한 미세먼지는 평균 25.6%, 초미세먼지는 평균 40.9% 줄여 공기를 정화하는 효과가 있다. 최근 인천시는 내년 52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해 8곳에 도시 숲을 조성할 계획을 밝혔다.
3800년 전 나무에서 얻은 탄소 감축 해법
작년 전 세계 화석연료와 산업 부문에서 배출된 이산화탄소는 약 370억t에 달한다. 숲을 포함한 육상식물은 매년 광합성을 통해 대기 중 이산화탄소 약 2200억t을 흡수하니 인류가 배출하는 양의 약 6배에 달하는 이산화탄소를 제거하는 셈이다. 그러나 이 육상 생태계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불에 타거나 썩어 분해될 때 흡수했던 이산화탄소를 다시 대기 중에 방출하며, 그 양은 매년 약 2200억t에 이른다. 따라서 현재의 탄소 순환 구조만으로는 이산화탄소 농도를 안정적으로 줄이기에 부족하다.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육상식물의 탄소를 더 오래 저장할 수 있는 새로운 접근법을 연구하고 있다.
지난 9월 학술지 ‘사이언스’는 땅속에 수천 년 동안 보존된 나무에서 영감을 받은 새로운 탄소 저장 방식을 소개했다. 메릴랜드대 등 미국과 캐나다의 연구진은 캐나다 퀘벡의 지하 2m 지점에서 3800년 전에 묻힌 적삼나무를 발견했는데 이 나무는 생체량의 95% 이상을 보존하고 있었다. 연구진은 나무가 썩지 않고 탄소를 오랜 시간 간직할 수 있었던 이유를 점토질 토양이 나무를 둘러싸 부패를 늦추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발견을 기반으로 연구진은 나무를 지하에 묻어 탄소를 장기 저장하는 ‘나무 보관소(wood vaulting)’ 방식을 제안했다. 매년 발생하는 목재 수확량과 잔재물을 땅속에 묻는 식으로 전 세계에서 연간 100억t의 이산화탄소를 제거할 수 있다고 밝혔다. 특히 이 방식은 다른 탄소 제거 방식보다 경제적이라는 장점이 있다. 이산화탄소를 공기에서 바로 뽑아내는 직접 공기 포집은 처리 비용이 1t당 600~1000달러 수준으로 추정된다. 반면 연구진이 제안한 목재 지하 매립 방식은 1t당 100~200달러 수준이고, 앞으로 10~20년 동안 규모를 확대하고 기술을 최적화하면 30~100달러까지도 비용을 낮출 수 있다고 연구진은 밝혔다.
숲은 수백, 수천 년을 견디며 우리에게 숨 쉴 공기와 마실 물을 제공하고, 지구의 온도를 지켜왔다. 3800년 전 땅에 묻혀 보존된 적삼나무가 암시하듯, 숲은 기후위기에 대한 해법을 품고 있다. 비자림처럼 오랜 세월을 버텨온 숲 하나하나가 기후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중요한 자산이며,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유산이다.
숲은 기후위기에 맞선 우리의 방패다.
정봉석 JBS 수환경 R&C 대표·부산대학교 환경공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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