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 "지하수와의 싸움이죠"…120m 지하 사용후핵연료 처분 검증 현장 가보니
"하나로의 사용후핵연료 보관소는 지금 반 정도 찼습니다. 현재 가동 수준으로 13~14년 후면 포화됩니다."
14일 대전 한국원자력연구원 '하나로(HANARO)'의 수조 한쪽 구석에는 길쭉한 사용후핵연료가 네모난 용기에 담겨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하나로는 반도체나 배터리 연구에 쓰이는 중성자와 암 치료에 쓰이는 방사성동위원소 등을 생성하는 연구용원자로다.
신진원 원자력연 하나로운영부장은 "사용후핵연료를 더 촘촘히 보관할 수 있는 '조밀 랙(rack)'을 도입하면 보관소 포화를 15년 정도 미룰 수 있다"며 "그 안에 빨리 영구처분시설이 확보되지 않으면 결국 하나로 운영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설명했다.
원자로에서 핵분열로 인한 열에너지나 중성자가 만들어지고 나면 사용후핵연료가 나온다. 사용후핵연료도 방사선과 열을 내뿜기 때문에 안전하게 처리돼야 한다. 연구용원자로인 하나로도 원자력발전소(원전)에 비하면 적지만 사용후핵연료가 나오기 때문에 처분할 방법이 필요하다. 월성 원전 등 오래 가동된 원전도 사용후핵연료 보관소가 거의 다 차고 있다. 특히 계속운전을 하려면 사용후핵연료 처분이 필수적이다.
사용후핵연료를 처리하기 위해 과거 우주로 쏘아 올리는 방법이 제안되기도 했지만 아직 발사체에 대한 신뢰성이나 비용 등이 확실하지 않아 구현이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과학자들이 가장 현실적인 방안으로 보는 것은 지하 수백 미터 깊이에 묻는 심층처분 방식이다.
심층처분 기술에서 가장 앞선 핀란드는 내년부터 지하처분장 '온칼로'를 가동할 예정이다. 한국은 아직 처분장 부지 선정 등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원자력연이 지하처분연구시설(KURT)을 운영하며 사용후핵연료 처분 기술을 개발하고 안전성을 실증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 지하 500m 환경에서 사용후핵연료 처분기술 검증
원자력연 동쪽 산 중턱의 KURT로 들어서 지하 터널을 잠시 걸어 들어가자 터널 주변으로 지하수가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지하처분 방식에서는 지하수가 핵심 변수다. 땅에 묻은 사용후핵연료에서 방사성 핵종이 새어 나오면 암석 균열을 따라 흐르는 지하수를 통해 지상으로 유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KURT에서는 지하수에 녹은 방사성 핵종이 암반 균열 등을 따라 이동하는 속도를 조사하고 있다. 김진섭 원자력연 저장처분실증연구부 책임연구원은 "사용후핵연료에서 나오는 실제 방사성동위원소를 쓰는 것은 아니지만 물리적 성질이 같아 이동속도가 비슷한 원소들을 이용해 실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사용후핵연료는 먼저 공학적 방벽인 처분 용기에 담긴 다음 지하에 묻힌다. 현재 설계에 따르면 처분 용기는 값싼 금속인 주철로 이뤄졌고 부식에 매우 강한 구리로 코팅된다. 처분 용기는 100만년 동안 사용후핵연료를 차폐할 수 있도록 설계됐다. 사용후핵연료에서 나오는 방사성 핵종은 10만년 정도 지나면 독성이 거의 사라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처분 용기에 쓰일 수 있는 금속도 추가로 연구되고 있다. KURT는 산꼭대기를 기준으로 지하 120m에 있다. 여기서 400m 구멍을 더 뚫어 지하 500m 환경에서 처분용기의 재료를 테스트하는 것이다. 금속 종류, 가공 방법이 서로 다른 350개의 다양한 금속 시편들을 500m 지하 환경에 집어 넣고 1년에 한 번씩 꺼내 상태를 확인한다.
김진섭 원자력연 저장처분실증연구부 책임연구원은 "지하 100m까지는 지하수에 산소가 포함될 수 있지만 지하 500m는 산소가 없는 혐기성 환경"이라며 "실제 상황과 똑같은 환경에서 실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전했다.
이어 "실증 연구와 (처분장) 부지선정을 동시에 진행해야 한다"며 "실제 처분장에 바로 적용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에 KURT 연구결과가 중요하다"고 전했다.
● 폐기물 양 줄이는 파이로프로세싱…"연구비 삭감 치명적"
사용후핵연료를 영구처분하기 전에 재처리하는 방법도 논의되고 있다. 핵연료 물질을 재활용하고 폐기물 양을 줄일 수 있다. 사용후핵연료를 용해시킨 수용액을 재처리하는 습식재처리(PUREX) 방식이 대표적이다. 이때 핵무기로 쓰일 수 있는 순수 플루토늄(Pu)을 분리하기 쉬워 핵확산금지조약에 걸린다는 제약이 있다.
건식 재처리 기술인 '파이로프로세싱'은 핵연료를 고온에서 녹인 뒤 핵연료와 폐기물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플루토늄만 회수할 수 없어 무기 생산에 쓰일 가능성이 적다. 활용되면 사용후핵연료의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부피를 거의 5% 수준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원자력연에서는 파이로프로세싱도 모의시험 시설인 '프라이드(PRIDE)'를 2015년부터 운영하며 전체 단계를 연구하고 있다. 미국과 공동연구를 통해 파이로프로세싱 기술의 타당성이 있다는 결론을 확인하기도 했다. 실용화 수준까지 어떻게 규모를 확대할 수 있는지가 다음 숙제다.
최근 정부의 연구개발(R&D) 예산 삭감이 파이로프로세싱 기술 개발에 발목을 잡을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류재수 원자력연 선진핵주기기술개발부장은 "모듈화와 자동화 장치를 개발해야하는데 크리티컬한 시점에서 연구비가 줄었다"며 "당초 계획보다 실증 규모가 작아지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밝혔다.
[이병구 기자 2bottle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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