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따라 시장에 가요
[서울&]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요리 프로그램이 화제를 모으자 출연했던 요리사들은 명성을 얻었고 재미난 심사평들은 삽시간에 유행어가 됐다. 상상도 못할 기발한 요리가 많았지만 그중에 나는 평범한 음식 하나에 눈길이 갔다. ‘김구이’다. “우리 집에서도 저렇게 했었는데…”. 반갑고 그리웠다.
우리 집에선 김에 기름 바르고 소금 뿌리는 일을 주로 내가 했는데, 해본 가락이 있어선지 티브이(TV)를 보는 순간 어디선가 참기름 냄새가 나는 것만 같았다. 지금이야 참기름 비싼 줄을 모르지만 그때는 병 입구에 흘러내리는 참기름 한 방울도 아까워서 조심조심 그릇에 따르던 엄마의 모습이 떠오른다. 사소한 밥반찬일 뿐인데도 딸린 추억이 차고 넘친다. 유행은 돌고 돌아 다시 오고, 사소하고 평범한 ‘아는 맛’은 추억의 옷을 입고 찬란하게 부활한다.
시장을 좋아하는 내 취향은 어렸을 때 만들어졌다. 어지간히 재미있는 방송을 하고 있어도 “집에서 TV 볼래? 엄마 따라갈래?” 하면 망설임 없이 따라붙던 곳, 그리하여 동행하는 행운을 얻게 되면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콩고물이 생기던 곳이 시장이었다. 즐겁고 신나는 곳이라는 시장의 이미지는 그렇게 만들어져 나는 지금도 지방에 여행을 가면 꼭 시장을 들른다. 해외여행을 가도 예외가 없다. 현지인들의 마켓에 들러 때깔 좋은 채소며 과일을 구경하고 카메라에 담는 재미는 그 어떤 박물관에서 얻는 것과 견줘도 뒤지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온라인으로 장을 보는 비중이 훨씬 높아졌지만 그럼에도 가끔 시장을 들러 마음의 허기를 채운다.
오늘 내가 방문한 곳은 경동시장. 좋은 김과 들기름, 그리고 덤으로 계절이 계절인 만큼 인삼과 대추도 살 겸 해서 목적지로 정했다. 경동시장은 서울의 전통시장 중에서도 면적이 가장 넓은 곳이라는데, 얼핏 보기에도 제기동부터 용두동에 걸쳐 넓게 자리한데다 구석구석 골목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 처음 온 사람은 필시 길을 잃을지도 모른다. 찬거리면 찬거리, 약재면 약재. 만약 여기서 못 찾았다면 다른 시장에 가도 소용없을 거다. 남대문시장이 관광객을 위한 시장이라면 경동시장은 현지인의 시장이다. 싱싱한 건 물론이고, 삭힌 콩잎이나 산머루처럼 마트에 없는 물건도 경동시장엔 다 있다. 구경하다 보면 ‘우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가격도 싸고, 이집 저집 비교하며 고르는 재미가 좋다. 새파란 무청이 붙은 조막만한 무를 보면서, 햇빛을 많이 받고 자라 초록 겉잎이 많은 알배기 배추를 보면서 “예쁘다” 감탄하는 건 어렸을 땐 몰랐던 일. 수북이 쌓아놓은 찰토마토 앞에 1만6천원이라 적어놓은 가격표를 보면서 “우와, 싸다” 놀라는 것도 전엔 몰랐던 일.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숙했던 내가 이젠 시장에서 제법 노련하게 물건도 고르고, 싼지 비싼지도 알아본다. 나이가 준 선물일 거다.
나이 얘기가 나온 김에, 경동시장에서 재미있는 곳을 하나 발견했다. 과거 경동극장 자리를 개조한 카페인데, ‘1960’ 숫자를 붙인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 복고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공간이다. 시장에서 청년들을 만날 줄은 생각도 못했는데 웬걸 시장이 엄청 힙해졌다. 널찍한 극장을 툭 터서 과거 스크린이 있던 자리에선 주문하고, 뒤로 갈수록 점점 높아지는 경사를 따라 계단을 올라가며 자리를 찾아보지만 거의 만석이다. 50~60대에겐 향수지만 자식뻘인 20대에게 복고란 신선하고 새로운 문화라는 걸 이곳에서 볼 수 있다.
시장을 걷다보니 자꾸만 돌아가신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는 나에게 김에 기름칠을 시키면서 훗날 그것이 추억이 될 줄 아셨을까? 흔하고 사소한, 별것 아닌 일상이 이렇게 추억으로 남을 줄이야. 훗날 내 딸들이 내 나이가 되어 추억에라도 기대어 위로받고 싶어질 때 그 아이들은 나와 함께 보낸 일상 중에서 무엇을 기억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그 아이들의 세상에선 과연 무엇이 레트로의 주인공이 될까? 별것 없어 보이는 내 일상이 소중해지는 이유다.
글·사진 강현정 작가(전 방송인) sabbun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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