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왕실서 남편과 ‘반전·반성’ 목소리 냈던 ‘유리코 비’ 별세
일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1915∼2016) 친왕의 아내인 유리코 비가 일본 왕실 최고령 나이로 15일 별세했다. 향년 101.
일본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은 궁내청 관계자 말을 인용해 도쿄 주오구 세이루카 국제병원에서 요양 중이던 유리코 비가 이날 숙환으로 유명을 달리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유리코비는 지난 3월 뇌경색과 폐 증상으로 입원했다. 한때 오른팔과 다리를 움직이기 힘들만큼 병세가 나빠졌지만, 이후 증상이 다소 안정돼 일반 병실로 옮겨 요양을 이어갔다. 이어 지난 8월부터 다시 폐렴 증세가 나타나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고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하지만 궁내청은 지난 8일 유리코 비의 전신 기능이 저하됐다고 발표한 뒤 일주일여 만에 그의 별세 소식을 전했다.
유리코 비는 쇼와 시대(1926~1989년) 히로히토 일왕의 막냇동생인 미카사노미야 친왕의 아내다. 1923년 귀족원 의원(참의원 전신)의 둘째 딸로 태어난 유리코 비는 18살이던 1941년 당시 일본 천황이 살고 있던 황거에 초대받았다가 미카사노미야 친왕과 사실상의 맞선을 보게 된다. 결혼 축하 만찬회가 열린 게, 일본의 미국 진주만 공습 하루 전인 1941년 12월이었다. 다음날 진주만 공습이 예정된 만큼 히로히토 일왕이 직접 “(만찬을) 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뜻을 밝혔지만, 오히려 이를 눈치채지 못하도록 개전 하루 전 결혼 축하연을 열었다. 이후 전쟁의 참화를 겪은 이들 부부는 일본 왕족이면서도 일본이 벌인 전쟁에 대해 반성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인 거로 잘 알려졌다.
특히 미카사노미야 친왕은 2차 대전 당시 청년 장교로 근무하면서 보고 겪었던 참상을 전하며 잘못을 사과하는 등 태도 때문에 우파 세력으로부터 공격을 받았던 인물이다. 실제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1943년부터 1년간 중국 난징 총사령부 근무 시절 병사들에게 독가스 생체실험 영화를 보여줬다는 일화를 전하며 “일본이 말하는 ‘성전’의 그늘에 실제로는 이런 일이 있었다”고 일본군의 잔혹한 행위를 비판한 바 있다. 또 일본 헌법에 전쟁 포기가 명문화된 이후인 1949년에는 “국민 한명 한명이 철저한 평화주의자가 돼야한다“며 “(전쟁 포기를) 헌법에 적는 것이 그 확실한 첫걸음”이라고 글을 쓰기도 했다. 또 일본 고대사 연구 전문가로 활약하면서 “역사 연구의 메스(칼)를 민중 생활 속 깊숙이 찔러넣어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2016년 100살 나이로 사망했다.
아내인 유리코 비는 남편의 길을 따랐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일본이 1945년 8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하기로 결정하자 청년 장교들이 왕족들이 거처하는 방공호까지 찾아와 “전쟁을 끝내선 안된다”고 요구했다. 이에 미카사노미야-유리코 부부는 “그만 끝내는 것이 좋다”고 이들의 의견을 막아섰다고 한다. 유리코 비는 당시 상황에 대해 “격론이 벌어져 당장이라도 피스톨(총알)이 오갈 것 같은 긴장감이 감돌았다”고 돌아봤다. 유리코 비는 전쟁이 끝난 뒤, 육아와 엄마-아기의 보건, 복지 사업 등 공적 활동에 적극적인 인물이었다. 높은 영아 사망률 개선 등을 위한 단체에서 62년간 총재를 맡아 이 분야에 헌신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유리코 비와 인터뷰했던 한 인사의 말을 인용해 “(유리코 비가) 전쟁 전 황실의 발자취를 자신의 경험으로 얘기할 수 있는 마지막 인물이었다”며 “전후에는 남편을 보좌하면서 자신도 적극적으로 공무를 위해 전국을 다니는 등 왕실의 모범 같은 존재였다”고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이날 “유리코 비가 의료, 복지, 문화, 스포츠, 국제 친선 등 폭넓은 분야에서 국가에 공헌을 해줬고, 특히 모성애 관련 사업에 오랜 기간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줬다”며 “국민과 함께 삼가 애도의 뜻을 표한다”고 밝혔다.
도쿄/홍석재 특파원
forchi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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