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고독한 사람들이 혹독한 운명을 응시하며 시대의 광기에 맞섰다
주제 사라마구 '수도원의 비망록'
편집자주
어쩐지 펼쳐 보기 두려운 고전에 대해 다시 조곤조곤 얘기해 봅니다. 1993년 등단한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배수아 작가와 출판 편집 기획자 출신 강창래 작가가 한국일보에 격주로 글을 씁니다.
블리문다의 어머니는 유대인 피가 섞인 개종자인데, 종교 재판을 받고 다른 수백 명의 죄수와 함께 처형장으로 가는 길에 군중 속에서 딸 블리문다 곁에 서 있는 젊은 남자를 본다. 남자는 왼손이 없었다. 아마도 나는 딸을 두 번 다시는 보지 못하겠지, 그런데 딸의 옆에 선 저 사람은 누구일까, 하고 블리문다의 어머니는 생각한다. 그 순간 블리문다는 마치 어머니의 속마음을 읽은 듯이, 우연히 곁에 서 있던 왼손 대신에 쇠갈고리를 끼운 남자에게 묻는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남자는 의외의 질문에 당황할 법하지만 곧 어떤 운명을 느낀 듯이 대답한다. 자신은 발타자르 마테우스라고. 그것이 그들의 첫 만남이었다. 국왕 주앙 5세가 후손을 얻는 조건으로 프란치스코 수도회에 마프라의 수도원 건설을 약속했으며 블리문다의 어머니가 마녀라는 죄목으로 태형을 당하고 앙골라로 추방되던 1711년, 브라질의 황금으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신분과 학식을 초월한 세 사람의 동행
발타자르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에서 왼손을 잃고 군대에서 쫓겨난 후 구걸을 하며 고향 마프라로 가던 중이다. 원래 평범한 농부이자 부상당한 전직 군인이었던 그는 블리문다의 동반자가 되면서 과학자이며 발명가인 바르톨로메오 신부를 알게 되고 신부의 발명품인 파사롤라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게 된다. 블리문다는 금식 상태에서 사물과 인간의 내면을 투시할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블리문다는 의도하지 않게 타인의 영혼을 꿰뚫어 보는 이 능력을 피하기 위해 매일 아침 잠이 깨자마자 눈을 감은 상태로 빵을 먹는다.
이들과 함께하는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발타자르와 나이가 같으며 식민지인 브라질에서 태어났다. 신부는 하늘을 나는 기구 파사롤라를 만들려고 한다. 무거운 기계 장치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위해서는 결정적인 기체가 필요한데, 그 기체는 인간의 의지를 응축한 에테르다. 에테르를 얻기 위해서는 블리문다의 특별한 능력이 필요하다. 인간 내면에 잠자고 있는 구름 형태의 의지를 수집해야 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 동안 발타자르의 육체노동, 블리문다의 투시력, 신부의 집요한 연구로 함께 노력한 결과 그들은 마침내 파사롤라를 완성한다. 이것은 오직 신분과 학식을 초월한 이들 영혼의 형제자매인 세 사람만이 가진 비밀이었다.
그사이 공주의 음악 교사로 초빙되어 왕궁에 있던 이탈리아 음악가 스카를라티가 이들과 잠시 비밀을 함께 나눈다. 그러나 문제가 닥쳤다. 신부의 파격적인 연구 행각이 종교 재판소의 의심을 샀고 마침내 기소당하게 된 것이다. 종교 재판에 회부되면 모든 것이 끝장임을 예감한 신부는 체포의 손길이 도착하기 전에 파사롤라를 타고 달아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그들은 최초의 비행을 시도하고 성공한다. 파사롤라는 당시 공주의 탄생으로 수도원이 건설 중이던 마프라의 상공을 날아가고, 그곳의 노동자들은 하늘에서 거룩한 성령을 보았다고 믿는다. 그러나 파사롤라는 아직 완벽한 기능을 갖추지는 못해서 그들은 방향 조절에 실패하고 깊은 산속에 불시착하게 된다. 다음 날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사라진다.
블리문다와 발타자르는 마프라로 가서 수도원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얻는다. 어느 날 그들은 바르톨로메오 신부가 스페인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발타자르는 영혼의 형제를 잃은 듯한 슬픔에 빠진다. 그는 마프라 수도원 공사 현장에서 일하는 중에도 주기적으로 산속에 숨겨둔 파사롤라를 찾아가 수리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정말로 하늘을 날았다는, 태양과 별에 가까이 다가갔던 일생일대의 꿈같은 경험을 잊지 못하며 언젠가 그 꿈이 다시 이루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어느 날 발타자르가 파사롤라를 홀로 수리하던 중 사고로 갑자기 빛이 들어오게 되고 그 바람에 에테르가 활성화되면서 기구가 상승한다. 그는 영영 블리문다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현실에 뿌리 두고 이상향을 꿈꾸다
'수도원의 비망록'은 주제 사라마구의 초기작으로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작품이다. 사라마구는 포르투갈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학비가 없어 학교를 중단하고 기계공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시민대학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문학을 접하게 되었고 어머니에게서 사회 비판을 다룬 소설책을 선물로 받았다. 그의 어머니는 문맹이었다고 한다. 19세 되던 해 친구에게서 빌린 돈으로 그는 최초의 책을 구입한다. 주로 공공 도서관을 이용하여 책을 읽고 공부한 끝에 저널리스트로 일할 수 있었으며 프리랜서 작가가 되어 글을 쓰려고 시도했으나 잘 되지 않자 첫 소설 출간 이후 19년 동안 글을 발표하지 않는다.
1922년생인 그는 젊은 날 대부분을 독재자 살라자르의 치하에서 보냈으며 파시즘이 종식된 후 55세인 1977년에야 두 번째 소설과 함께 작가로 돌아왔다. 1982년 발표된 '수도원의 비망록'은 환상적이면서도 현실의 뿌리를 잃지 않은 흥미진진하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호평을 받으며 큰 성공을 거두었고 사라마구는 작가로서 재정적 독립을 이루게 된다. 이 소설의 특징은 비참한 운명을 다루면서도 감상에 빠지지 않는 유머러스함, 실제와 가상의 혼재, 그리고 18세기 초 노동 현장의 생생하면서도 긴박감 넘치는 사실적인 묘사이다. 사라마구가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이며 매우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을 가진 것은 유명하다. 그 영향인지 소설에는 이상향에의 그리움이 느껴진다. 예를 들자면 노동자 발타자르와 신비한 능력의 블리문다, 그리고 이성과 지식의 바르톨로메오 신부는 완벽한 삼위일체의 현신을 이루고 있다.
막강한 권위에 맞서는 고독한 사람들
책에 관한 대화 도중에, 한 친구가 문득 지금까지 읽은 문학작품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랑 이야기는 무엇이었느냐고 물었다. 너무 오래 고민하지 말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을 말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나는 사라마구의 '수도원의 비망록'이라고 대답했다. “문학”과 “사랑”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작품이었다. 함께 있던 다른 친구 R은 –그는 러시아어 번역가이기도 하다– '죄와 벌'이라고 대답했다. 나는 좀 놀랐는데, '죄와 벌'을 오래전에 읽었지만 그 작품을 단 한 번도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이 책 '수도원의 비망록'을 사랑 이야기로 보지 않는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블리문다와 발타자르의 이야기는 부피로 보자면 책의 아주 적은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고 또 책 전체에 더욱 잔혹하고 아프고 절실한 삶의 이야기들이 장황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문체에 실려 파도치기 때문이다.
마리아 바르바라 공주, 자신의 탄생을 계기로 아버지인 국왕이 마프라에 거대한 수도원을 짓게 되지만 그 공사는 공주가 스페인 왕자와 결혼하기 위해 고국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완성되지 않았다. 화려한 왕궁에서 막강한 권력자의 딸로 태어났으나 공주는 천연두를 앓아 얼굴이 흉하게 얽었다. 결혼하기 위해 스페인으로 가던 마차 속에서 공주는 마프라의 공사 현장으로 밧줄에 묶여 노예처럼 끌려가는 인부들을 보게 된다. 자신이 태어났으므로 세워져야 하는 수도원을 위해서이다. 공주는 어머니 왕비에게 묻는다. “어머니, 태어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러자 왕비가 대답한다.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것이란다.”
그렇다. 태어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인간의 고통에 무서우리만큼 둔감함 권력, 국가와 교회의 무자비함, 무지의 고통과 슬픔, 그 모든 것 위에 시뻘건 화형대의 구름처럼 드리운 종교적 광기. 계몽의 시대는 아직 포르투갈에 도래한 것 같지가 않고 어두운 중세의 파도가 사방에 여전히 넘실거린다. 그러나 또한 막강한 권위에 맞서는 평범하면서도 고독한 사람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인물로 나는 블리문다를 기억하겠다. 내가 이 소설에 대해서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블리문다다.
사라진 발타자르를 찾아 그녀는 9년 동안 온 나라를 맨발로 떠돌아다닌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이에게 외팔이 사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서. 늙고 여위고 마귀할멈처럼 흉측해진 블리문다, 그러나 길 위에서 기적을 일으키며, 문밖에서 서성이는 여자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고독을 지키면서, 이 세상에 대한 애정과 직관으로, 혹독한 운명을 응시하며, 그들 세 명이 만들어낸 지상의 삼위일체 중 살아남은 유일한 자. 화형대에서 타다 남은 발타자르의 시신에서 구름처럼 일렁이는 의지를 거두어 주며, 자신 앞에 약속된 종교 재판의 화형대를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그러나 “땅에 속했으므로 별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던 한 여인.
배수아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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