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계절 이 여행] 대가야가 남긴 발자취, 고령
(시사저널=글 남혜림·사진 신규철)
낙동강 일대를 호령했던 대가야를 잇는 고장, 경북 고령에서 산과 강을 맴돌며 그윽한 가을을 만끽했다.
한없이 높은 하늘에 구름 몇 조각이 떠간다. 크고 작은 것이 해를 가릴 때마다 고분군에 검은 그늘이 진다. 현대를 사는 사람이 1500년 전 융성했던 나라를 목도할 방법은 없다. 그들의 발자취를 좇아 발견한 유적으로 어렴풋이 상상할 뿐. 이 땅에서 번영을 누리다 스러진 왕국을 찾아 길을 나섰다. 세상으로 나오지 않은 이야기가 잠들었을 고분 사이를 지나며 걸음을 재촉한다. 지금 이곳은 대가야의 고도, 경북 고령이다.
대가야의 시간 속으로
아득한 옛날, 가야산을 돌보는 산신 정견모주가 있었다. 그는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을 닦아 주고자 하늘에 기도를 올린다. 이에 감응한 천신 이비가지가 내려오고 둘은 연을 맺는다. 곧 두 아들이 태어나니, 첫째 뇌질주일은 대가야 시조인 이진아시왕, 둘째 뇌질청예는 금관가야 수로 왕이 된다. 조선 시대 지리서 에 수록된 대가야 건국 신화다. 하늘이 내린 알에서 태어난 사람이 가야 임금이 되었다는,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금관가야의 가락국 신화와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낙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성장한 가야, 그중 대가야는 신라의 공격으로 최후를 맞기 전까지 금관가야에 이어 가야 연맹을 이끌었다. 영향력이 가장 강하던 시기에는 전라북도 일부 지역이 대가야에 속했으며, 바다 건너 일본과도 교류했던 기록이 발견됐다. 562년, 대가야가 이끄는 가야 연맹은 일찍이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한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던가. 다른 국가보다 문헌이 희소하니 상대적으로 알려진 사실이 적거나 왜곡되기도 했다.
진실의 빛은 가야를 저버리지 않았다. 대가야읍 주산 지산 동 고분군에 놓인 봉분 약 700기가 대가야 왕과 귀족 것으로 밝혀졌고, 1970년대에 본격적인 발굴을 시작한다. 일제가 도굴한 탓에 훼손을 우려했지만 일곱 고분에서 어마어마한 유물이 말 그대로 쏟아졌다. 덩이쇠와 각종 철기, 토기, 화려한 장신구 등 껴묻거리가 온전한 상태로 세상에 나왔다. 베일에 감춰진 가야의 비밀을 풀 열쇠 꾸러미를 찾은 것이다.
과거와 현재가 보이는 언덕에서
출토된 유물은 지산동 고분군 바로 아래 개관한 대가야박물관에서 마주한다. 2층 규모 건물에 구석기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고령 땅의 역사를 세세하게 다뤘다.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소속 국립박물관이 함께 여는 가 한창이다. 경주 금령총에서 발견한 금관과 금방울, 금허리띠가 어두운 전시실에서 은은하게 빛난다. 형태와 소재, 세부 양식을 유심히 봐 둔다. 상설전시실에 전시한 가야 것과 비교하기 위해서다. 각진 사슴뿔 형상을 한 신라 금관과 달리 가야 금관은 주로 풀잎이나 꽃이 연상되는 유려한 곡선이 특징이다. 가야는 금속이 아닌 흙으로도 미적 감각을 뽐내 왔다. 도자기 재료 중 최 고로 치는 고령토로 토기를 빚은 데다 물결, 빗금, 새 발 모양 등 다양한 무늬를 섬세하게 새겨 단아한 멋이 느껴진다. 김미숙 문화관광해설사가 전시품을 하나씩 가리키며 차근차근 설명한다. "박물관에 전시한 유물 90퍼센트 이상은 복제품이 아닌 진품이에요. 수 세기 전에 사용한 물품을 직접 보도록 해 자부심이 크지요." 1500년 전 융성했던 나라의 흔적이 바로 눈앞에 있다. 쉬이 시선을 뗄 수 없어 토기 만듦새, 무늬 하나까지 꼼꼼히 훑는다.
이것만으로 놀라기엔 이르다. 대가야왕릉전시관으로 들어서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지산동 고분군 최대 무덤이자 가야 왕의 것으로 추정하는 44호분을 실물 크기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44호분에서 찾은 소형 순장돌덧널무덤만 32기라 하니, 그 규모에 압도된다. 고분 내부 구조를 살피고 밖으로 나와 유연한 곡선이 이어지는 산길을 걸었다. 사부작사부작 언덕에 오르자 사위가 고요하다. 산등성이에 늘어선 고분과 고령 시내가 동시에 담기는 풍경을 본다. 죽음 뒤에도 삶이 계속된다고 믿었던 가야 사람은 생을 마친 이가 내세에서도 현실과 같이 살기를 바랐다. 이 광경을 눈앞에 두고 나서야 어렴풋이 깨달음이 밀려왔다. 삶과 죽음은 늘 맞닿아 있다고.
가야금 선율에 귀 기울이면
고령은 가야금의 고장이기도 하다. 거문고를 제작한 왕산악, 조선의 아악을 정비한 박연과 더불어 '한국 3대 악성'으로 불리는 우륵이 가야금을 만든 장소가 고령 쾌빈리다. 그는 대가야 가실왕의 명을 받아 각지에서 사용하던 악기를 통일하고, 중국 악기 쟁을 본떠 가야금을 고안한 데다 연주곡 열두 개를 창작했다. 가야금 소리가 정정해 그가 지내던 마을을 정정골이라 했는데, 이곳은 여전히 우륵의 명맥을 잇는다.
우륵국악기연구원에 도착했을 때는 날이 흐렸다. 빗방울이 떨어질 듯해 걸음을 옮기던 중 노지에 널린 나무판자가 눈에 걸린다. 가지런히 놓인 모양을 보니 중요한 목재이지 싶어 살펴보다 가야금 악기장 김동환 명장과 마주쳤다. "걱정 마세요. 오동나무 수분과 진액이 빠져나가도록 건조하는 거예요. 눈이 오나 비가 내리나 5년은 밖에 두어야 합니다." 오동나무는 가야금을 이루는 중요한 재료다. 적당한 크기로 재단한 뒤 바깥에서 말리는 긴 시간 동안 목재는 비바람과 볕을 온몸으로 맞는다. 모든 나무가 가야금으로 쓰이지는 않는다. 김 명장은 매 일 아침 나무 상태를 확인한다. 수박 고르듯 두드렸을 때 '둥' 하는 북소리가 나는 것이 최상품이다. 잘 마른 오동나무는 대패로 표면을 손질한다. 인두질을 마친 뒤 줄을 거는 현침 등을 붙이고 소리를 고르는 안족과 돌괘를 다듬으면 제작 막바지에 다다른다. 정성스레 찌고 말린 명주실로 줄을 팽팽하게 얹은 후에야 가야금이 탄생한다.
김 명장은 30년 동안 숱하게 오동나무를 가야금으로 만들어 냈다. 극적인 계기로 이 길에 들어선 것은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주변에 가야금을 뜯거나 제작하는 이가 많았고, 당연히 곁에는 늘 가야금이 자리했다. 스물한 살이 되던 1988년, 가야금 제작에 입문한 뒤로는 새벽같이 일어나 서울 일원동과 창신동을 오가며 공부에 몰두했다. 손재주가 좋아 배움이 빨랐다.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 뻣뻣한 목재가 근사한 악기로 변했다. 완성한 가야금에서 명징한 소리가 날 때면 가슴이 짜릿했다. 예민한 청력과 갈고닦은 기술을 활용해 소리를 만들고 깎아 내는 과정이 그저 재미있었다.
2006년 우륵박물관과 우륵국악기연구원이 생기며 거처와 작업실을 고령으로 옮겼다. 가야금의 매력을 알리고자 야심차게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니, 바로 가야금 제작·연주 체험 프로그램이다. 10년 넘게 진행해 온 체험은 여전히 인기가 높다. 김 명장의 안내와 지도 아래 체험자는 직접 나만의 가야금을 제작하고, 고령군립가야금연주단 소속 단원에게 연주법도 배운다. 연주가 가능한 진짜 가야금을 만들 수 있다는 소식에 인근 도시인 대구뿐 아니라 경남, 전북 등 전국 각지에서 신청자가 몰린다. 연주자가 특별한 의뢰를 할 때는 맞춤으로 악기를 제작한다. 일반적으로 전통 방식을 고수하지만, 연주자의 주법이나 취향을 보고 방법을 수정하기도 한다. 악기가 연주자 손에 익어야 좋은 가락이 나오기 때문이다. 줄을 뜯고 누르자 구성진 음이 튀어나온다. 줄베개를 풀어 끈을 조이고, 안족을 조정해 조율을 이어 간다. "악기를 받아 간 연주자가 전화로 종종 소식을 알리기도 합니다. 제가 만든 가야금 소리가 좋아서 무사히 공연을 마쳤고, 반응도 뜨거웠다는 감사 인사를 받을 때 가장 행복해요." 요즘 김 명인은 후진 양성에 여념이 없다. 악기장은 물론이거니와 연주자도 많지 않은 상황. 한 사람이 귀하니 고령에서 가야금을 배워 더 넓은 곳으로 나가려는 청소년에게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가야 사람이었던 우륵은 왕국이 스러질 즈음 신라로 망명했으나 고향을 떠올리고 그리워하며 가야금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주어진 환경에서 묵묵히 노력하는 일. 김 명인과 우 륵의 닮은 점인 듯하다.
노란빛 가을, 다산 은행나무 숲
고령 다산면은 가을이 오면 온통 노란 세상으로 변 한다. 낙동강의 흐름이 만든 7만 9338제곱미터(약 2만 4000평) 규모의 충적평야에 자리한 은행나무 숲 때문이다. 하루를 넘겨 날이 완전히 갠 이른 아침, 낙동강 근처로 향했다. 물안개가 걷히고 눈부신 햇살이 은행나무에 내려앉는다. 하늘을 향해 뻗은 은행나무들의 수령은 30년 정도다. 1990년부터 조성한 부지에서 나무들은 느릿느릿 조용히 자랐다. 아직 계절이 무르익지 않아 대부분 초록색을 띠지만, 키가 큰 나무는 벌써 위쪽이 노랗게 물들었다. 이제 빽빽한 숲으로 들어간다. 물가에는 갈대밭이 펼쳐지고, 저 멀리 강 건너편에 대구가 맨눈으로 보인다. 은행나무가 주변을 둘러싸니 다른 세계에 온 듯하다. 햇빛이 은행잎을 투과하자 주변 이 환해진다. 머리 위에는 주렁주렁 열린 은행이 가득하다. 신비롭고 오묘한 기분에 휩싸여 종종거리는 걸음으로 숲을 탐험한다.
일찍이 이러한 경관을 발견한 창작자들은 이곳을 영상 작품 배경으로 활용했다. 스릴러 사극 시즌 1·2와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등 인기리에 방영한 여러 작품을 다산 은행나무 숲에서 촬영했다. 덕분에 SNS에서 화제가 되었고, 곧 새로운 고령 여행지로 떠올랐다. 게다가 웨딩 사진, 가족사진 찍을 장소를 원하는 이에게도 입소문이 났다. 낙동강 자전거길이 지나는 구간이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띈다. 은행나무 숲을 찾는 목적은 달라도 방문한 이들은 모두 노란빛 추억을 안고 돌아간다.
단풍이 절정을 이루는 11월 중순 즈음에는 노란 은행잎이 비처럼 내린다. 잎이 모두 떨어져도 괜찮다. 계절을 따라 단풍은 다시 물들 테다. 영화롭던 왕국은 오래전 스러지고 없지만, 대가야의 유산은 은행나무처럼 언제까지고 우리의 계절을 충만하게 할 것이다.
Copyright © 시사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