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의 교만이 빈자의 분노로 드러나듯… 비주류는 사회의 거울[서동욱의 세계의 산책자]
18세기 디드로 作 ‘라모의 조카’
고귀 - 비천함 품은 분열된 인격
이성 - 비이성 속 정신착란 상태
헤겔·푸코, 철학적 분석 몰두
지배계층에 조소 뱉은 조카처럼
세상 진실은 비주류 통해 드러나
18세기 프랑스의 계몽주의 철학자 디드로가 쓴 소설 ‘라모의 조카’(황현산 역)는 특이한 운명을 지닌 작품이다. 러시아의 계몽군주 예카테리나 2세는 디드로 생전에 그의 장서들을 모두 구매해주는 방식으로 가난에 허덕이던 이 철학자를 후원했다. 디드로는 여제가 구매한 장서들의 사서 자격으로 자신의 책들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다. 1797년 디드로가 죽은 후 그의 장서들은 구매자인 러시아 여제에게로 모두 보내져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서관에 소장되게 된다. 이 장서들 틈에 바로 디드로의 미발표 원고 ‘라모의 조카’가 숨어 있었다. 이후 이 원고의 필사본이 모종의 경로를 통해 독일의 문호 괴테의 손에 들어가게 되고, 괴테의 독일어 번역으로 이 책은 1805년 처음으로 유럽 지성계에 소개돼 비상한 관심을 모은다.
첫 독자들 가운데는 헤겔도 있었는데, 그는 2년 뒤 출간하는 자신의 대표작 ‘정신현상학’(임석진 역)에서 대혁명 직전 시민사회의 정신적 초상화를 정확히 그려낸 작품으로서 이 소설에 대한 분석에 몰두한다. 이 18세기 소설에 대한 철학자의 관심은 20세기에 와서도 그치지 않는데,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이규현 역)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소설은 왜 그토록 철학자들의 관심을 끈 것일까?
‘라모의 조카’의 주인공 장 프랑수아 라모는 실존 인물로서, 작곡가 장 필리프 라모의 조카이다. 이 조카 역시 음악가였으나 그 활동은 별 볼 일 없었고, 진짜 정체는 여기저기서 얻어먹고 다니며 말썽만 일으키는 ‘건달’이다. 소설은 철학자 디드로가 어느 날 이 건달을 만나 당시의 여러 실존 인물들과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일종의 대화록이다. 소설은 빌어먹는 처지의 라모의 조카가 성직자 등 동시대의 지배계층에 대해 쏟아내는 울분과 조소로 가득 차 있다.
라모의 조카가 보여주는 중요한 면모가 있는데, 한마디로 ‘분열된 인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헤겔의 관심을 끈 것도 바로 이 점이었다. 라모의 조카의 외관이 이미 분열적인 그의 내면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오늘은 더러운 속옷에, 찢어진 바지에, 누더기를 걸치고 거의 신도 신지 않은 채, 고개를 숙이고 가며 사람들의 눈을 피하는 꼴이 그를 불러 동냥을 주고 싶을 지경이다. 내일은 머리에 분칠하고, 구두 신고, 머리를 컬하고, 옷을 잘 입고, 고개를 높이 들고 보란 듯이 걷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그를 어김없는 신사로 여기게 되리라.” 한마디로 “그는 고매함과 비천함, 양식(良識)과 무분별의 혼합물이다.” 이런 양면성은 디드로가 라모의 조카와 대화를 이어나갈수록 점점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 총명함과 이 저열함, 차례를 바꿔 이토록 올바르고 이토록 그릇된 생각들, 이 전반적인 감정의 퇴폐, 이 완벽한 비열, 이 유례없는 솔직함에 나는 아연해졌다.”
한 인간 안에 서로 상반되는 이런 면모들이 공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라모의 조카는 헤겔이 ‘고귀한 의식’이라고 부른 것의 반대편에 있는 사람이다. ‘고귀한 의식’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정신현상학’에 등장하는 몇몇 독특한 표현들에 익숙해져야 한다. “국가권력과 부(富)를 자기와 동등시하며 이와 관계하는 의식은 ‘고귀한’ 의식이다.” 한마디로 고귀한 의식은 권력과 부 자체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귀족’의 의식이다. 반면 권력과 부를 자신과 동일시하지 못하는 의식은 ‘비천한 의식’이라 불린다. 평민들이 귀족들의 자선을 원하면서도 귀족들을 증오하듯 비천한 의식은 언제라도 반란으로 치달을 수 있다.
그런데 한 사회 전체의 진리는 고귀한 의식 쪽이 아니라 비천한 의식을 통해서 드러난다. 고귀한 의식이 자기 자신과 동일시하는 부를 빈자(貧者)들에게 ‘시혜’할 때 일어나는 일을 예로 삼아볼 때 이 점을 이해할 수 있다.
헤겔은 말한다. “교만한 생각을 안고 한 끼니의 식사를 베풀 때마다 이를 받아들이는 상대방의 자아 그 자체를 휘어잡고 그의 마음속까지도 임의로 다룰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 나머지 부자는 상대방의 내면에 일고 있는 분노를 간과하고 만다…(부자는) 시혜자로서 그가 생각할 수 있는 이러저러한 소견이나 의향이 가차 없이 배반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만다…결국 부자의 정신은 세상의 표면을 훑고 다니는 망상과 같은 것이다.”
교만한 부자가 한 끼 식사를 베풀며 그 자선으로 수혜자를 자기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할 때, 부자는 자신의 그런 생각이 상대방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분노 속에 가차 없이 배신당한다는 것을 모른다. 한마디로 부자는 한 사회 전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회 전체 안에서 부와 부자가 어떤 취급을 당하는지, 부자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드러내주는 것은 수혜자의 의식 쪽이다.
이러한 상황은 라모의 조카에게서 목격되는 분열된 의식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어느 날은 부자처럼, 어느 날은 거지처럼 보인다. 그는 부를 동경하면서도, 그것과 일체가 되지 못한 채 부자를 증오한다. 고매함과 비천함이 서로 맞지 않는 퍼즐 조각들처럼 그의 의식 속에 공존한다. 이런 분열적인 의식 속에서 분열된 사회, 혁명을 앞두고 있는 사회 전체는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스스로 분열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가운데 이 분열상(相)을 언어로 발설하는 의식은 세계의 전체적인 양상과 그의 혼란함을 조소하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마저도 조소하지만, 여기서는 동시에 온 세상의 혼란스러움에서 풍겨오는 반향을 엿들을 수가 있다.”
‘광기의 역사’의 저자로서 푸코는 라모의 조카가 보여주는 미친 듯한 행태에서, 이성과 뒤섞이며 모습을 드러낸 ‘비이성’의 얼굴을 본다. ‘라모의 조카’는 18세기가 “서커스에서 망설임과 암암리의 불안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즐거워하면서 ‘동물 조련사’의 노릇을” 하듯이, 비이성의 말을 들어주는 시대였음을 알려준다. 이 비이성은 데카르트가 탐색했던 것 같은 이성의 진리를 찾기 위해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이성과 뒤섞여 세계 자체의 본질을 드러내 주는 것이다. 푸코는 말한다. “사람들이 이성에 관해 자문할 수 있는 것은 바로 비이성의 밑바닥에서이고, 그래서 세계의 본질을 재파악할 가능성은 현실의 존재와 비존재를 진실과 대등한 환각 속에 하나의 전체로 모으는 정신착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다시 열린다.” 진실을 드러내기 위해 환각이 배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비존재가, 진실과 환각이 서로 대등하게 하나의 전체를 이루면서 비로소 ‘세계의 본질’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전체를 이루면서 세계의 본질을 파악할 수 있게 해주는 ‘정신착란의 소용돌이’가 바로 라모의 행태이다.
푸코가 “라모의 조카가 내보이는 정신착란”이라며 언급하는 소설의 장면은 다음과 같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날뛰며, 혼자 무동이요, 무희요, 남자 가수, 여자 가수, 오케스트라 전체, 가극단 전체가 되어, 자신을 스무 개 다른 역으로 나누고, 달리고, 멈추고, 귀신 들린 사람인가 싶게 눈을 희번덕이고, 입에 거품을 물었다.” 이런 식의 ‘팬터마임’을 하는 라모의 조카는 문자 그대로 미친 사람 같다.
이런 미친 팬터마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푸코는 말한다. “비이성은 팬터마임의 얇은 표면에 의해 자기로부터 분리된 세계 자체이자 동시에 동일한 세계이다.” 이 말만큼 비이성은 이성으로부터 배제되지 않고 이성과 섞여 하나의 세계의 본질을 드러내 준다는 것을 잘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라모의 조카의 광기 어린 팬터마임 속에서 비이성은 하나의 연기, 즉 팬터마임 속에 들어 있는 허구로서 이성적 세계와 분리된다. 동시에 그것은 이성적 세계의 일부로서 라모의 조카가 실제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광기는 라모의 조카가 떠맡는 배역이면서 동시에 그의 실제 삶 자체의 성격이다.
결국 헤겔과 푸코는, 그들 철학 사이에 놓인 거대한 간격에도 불구하고, ‘라모의 조카’를 통해 상당히 서로 근접하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분명한 비주류인 라모의 조카가 권력과 부를 가진 사회의 주류에게 반감을 가지는 의식으로 나타나건, 가난으로 나타나건, 비호감의 비이성으로 나타나건, 우리가 몸담은 세계의 진실은 이 비주류의 거울에 비추어보지 않으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강대 철학과 교수
■ 용어설명 - 드니 디드로
1745년부터 약 20년간 볼테르, 몽테스키외, 루소 등 당대의 계몽사상가들과 함께 본문 17권·도판 11권의 ‘백과전서’ 완성에 매달렸다. 중세적 가치관으로부터 벗어나자고 주장하며 교회, 전제 정치 등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프랑스 대혁명으로 이어진 사상이 되기까지 ‘백과전서’는 정부로부터 발행금지명령 등 수난을 겪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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