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사회는 어떻게 ‘여성의 지옥’ 만들었나[북리뷰]
한국여성학회 기획│허윤·손희정·이민주 등 지음│한겨레출판
N번방·딥페이크·메갈색출 등
온라인 성범죄·성차별 고발
페미니즘 학자 글 12편 수록
“변화 시도하면 ‘페미’ 낙인
알고리즘 편향부터 바꿔야”
두 달 전, 여성 6000여 명이 서울 혜화역 주변 대학로에 모여 여러 차례 시위를 벌였다. 딥페이크를 규탄하기 위해서였다. 딥페이크는 실존 인물의 사진이나 영상을 사용해 만든 합성 포르노물로, 텔레그램 등 SNS를 통해 빠르게 퍼져갔다. 이런 걸 만들고 공유하는 행위는 당연히 성폭력 범죄에 해당한다. 온라인 공간에 일상을 공유하는 게 익숙한 시대이므로, 누구나 이런 디지털 성폭력 행위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사태는 심각하다.
그러나 디지털 기술은 번개처럼 빠르고 범죄는 기민한데, 가부장제 체제에서 형성된 관행은 ‘널널’하고 법은 느릿하다. 인식이 변화하고 법이 마련될 동안, 젠더 폭력의 희생자들은 늘어가고, 범죄자들은 천문학적 수익을 올린다. 디지털 기술이 일상화한 이래 소라넷, N번방, 웰컴투비디오,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범죄의 악성 구조는 지금껏 비슷하게 재생산됐다. 이에 대한 재성찰이 요구되는 이유다.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이 때마침 나왔다. 한국여성학회 40주년을 맞아 기획된 이 책은 페미니즘 관점에서 디지털 사회의 문제들을 파헤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할 목적으로 쓰였다. 손희정, 이민주, 이지은, 임소연, 엄혜진, 김보명 등 학계의 대표적인 페미니즘 연구자들이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을 창출하기 위해 함께 입을 모은 것이다.
이 책에 실린 12편의 글들은 디지털 사회에서 여성의 삶과 고통에 주목한다는 점에선 서로 이어져 있으나 각각 다른 현장에서 생성되었다. N번방이나 딥페이크 같은 성범죄, 온라인 여성혐오 발언, 게임업계 등에서 벌어진 ‘메갈 색출’ 같은 사상 검증, 여성 관련 편견을 확대 재생산하는 생성형 인공지능(AI)의 윤리, 정보기술(IT) 업계의 젠더 편향, 능력주의와 여성 배제의 결합, 임신·출산·양육 등 재생산 과정에서 여성 자기 결정권 등 다양하기 짝이 없다.
우리 흥미를 특별히 끄는 건 디지털 페미니즘, 즉 기술과 함께 빠르게 진화하는 온라인 여성혐오를 이해하고 극복하는 데 필요한 지식이다. N번방 등 온라인 성착취, 딥페이크 등 디지털 성폭력을 일부 남성들의 재미나 장난으로 보아선 안 된다. 이는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의 작동 결과인 까닭이다. 온라인 공간에 신체 훼손 또는 인간 존엄 파괴 현장 등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혐오와 폭력이 뒤범벅된 사이버 지옥을 연출함으로써 돈을 버는 폭력 산업이 번창하는 것이다.
고어 자본주의는 잔혹한 폭력을 자원 삼아 사람들 주목을 빨아들임으로써 부를 축적한다. 여성을 ‘페미’ ‘비정상’으로 낙인찍고 죽음으로 내몰면서 돈을 세는 악플러나 사이버 레커 등은 그 한 예이다. 게임, 음악, 연예 등 콘텐츠 시장에서 사소한 사실을 트집 잡아 여성 개발자나 아티스트를 향해 온라인 집단 공격을 수행함으로써, 남성들이 여성의 경제적 기반을 박탈하는 행위도 마찬가지다.
그 바탕엔 포스트-포드주의 사회에 만연한 능력주의가 있다. 갈수록 나빠지는 노동 조건과 소수에게 부가 집중되는 현실은 대다수 남성을 무력하게 만든다. 이 박탈감을 이겨내고 가부장의 권위를 유지하려고 남성들은 여성에 대한 “폭력을 자기 가치 확인의 도구이자 생계 수단으로” 여긴다. 그런데 몰락한 남성들의 여성혐오엔 일종의 착시 현상이 있다. ‘돈 되지 않는 몸’으로 태어난 남성과 달리, 여성은 자동으로 ‘수익을 발생시키는 자산’을 지닌 몸을 타고났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몸을 자본화해 돈을 버는 것은 남성들이다.
조리돌림에서 딥페이크에 이르기까지 여성혐오와 살해는 디지털 기술과 결합해 온라인 공간에서 손쉽게 실행된다. 그 이유 중 하나로 IT 업계의 고용 관행이 있다. 여성혐오나 성차별 같은 알고리즘 편향을 바로잡는 등 여성의 관점에서 관련 기술을 개발할 인력이 모자란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성차별은 줄었으나, 자녀 있는 여성 개발자가 없다든지, 여성을 핵심 업무에서 배제한다든지 하는 암묵적 불평등이 만연하다. 이런 구조에서 디지털 성폭력이 쉽게 잦아들 리 없다.
페미니즘의 가장 큰 특징은 현장성이다. 문제 있는 곳에 사유를 빠르게 투여해 일단 가능한 지식을 창출하는 힘이 두드러진다. 운동을 생각하게 하고, 사유를 행동하게 할 때, 현실을 움직여 다른 미래를 가꿀 수 있다. “발 디딘 세계에서 출발”해 여성이 겪는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질문을 던지고, “사회 변화를 촉구”한다는 여성학의 출발점을 잘 보여주는 책이다. 396쪽, 2만 원.
장은수 출판평론가
Copyright © 문화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속보]가족 앞에서 전 여친 살해 34세 서동하…머그샷 공개
- “노벨상 조카 한강, 구원서 멀어질까 걱정” 절연한 목사 삼촌의 편지
- ‘8번 이혼’ 유퉁 “13세 딸 살해·성폭행 협박에 혀 굳어”
- “집주인인데 배관 확인 좀”…문 열었던 20대女 성폭행 위기서 탈출
- 초등생 6명 100차례 성폭행 교사 ‘무관용’ 사형…中 “무관용 원칙”
- 너무나 늦은 ‘단죄’… 윤미향 징역형 확정
- 결국 구속된 명태균…가속 붙는 ‘공천 개입 의혹’ 수사
- [속보]경북 영천 계곡서 신체 분리된 시신 발견…“상당 부분 백골화”
- ‘김건희 친분’ 명예훼손 소송 배우 이영애, 법원 화해 권고 거부
- 인천 등산로서 벌어진 판돈 100만 원 윷놀이 정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