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룡 평전〉, 역사의 격랑에 휘말린 한 가문의 이야기

차형석 기자 2024. 11. 15.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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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가문이 있다. 전남 보성의 명문가로 통했던 정씨 일가는 현대사의 질곡에서 8명이 죽고 37명이 투옥되었다. 최근 출간된 〈정해룡 평전〉에는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10월31일 <정해룡 평전>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문영심 작가, 함세웅 신부, 정길상씨(왼쪽부터). ⓒ시사IN 박미소

최근 출간된 〈정해룡 평전〉은 1981년 3월 재판 장면에서 시작한다. ‘피고인 정춘상 사형, 정종희 사형, 정길상 무기징역.’ 검사의 구형이다. 죄명은 ‘간첩죄’. 1982년 2월, 대법원에서 정춘상 사형, 정종희 징역 12년, 정길상 징역 7년으로 형이 확정되었다. 이른바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이다. 사건의 핵심 인물이자 집안의 큰어른인 봉강 정해룡(1913~1969)이 세상을 떠난 이후의 일이다.

사건은 1965년 8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이 난 1950년에 북으로 간 (정해룡의 동생) 정해진이 15년 만에 보성 집에 나타났다. 정해진은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한 이였다. 그는 봉강에게 월북을 권유했다. 해방 후 혁신정당 운동에 가담한 이후로 경찰의 감시를 받던 봉강은 자고 있던 아들 정춘상을 깨워 ‘작은아버지를 따라가라’고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명을 따랐다. 월북했다 보름 뒤에 돌아왔다. 1967년 5월, 정해진이 다시 남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봉강과 (숙부) 정종희를 만났다. 봉강이 사망한 지 5년이 지난 1974년, 정종희는 정춘상의 동생인 정길상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길상씨는 ‘충격이었지만,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길상씨가 〈정해룡 평전〉을 쓴 문영심 작가에게 한 표현대로, ‘별로 뭘 한 게 없는, 실정법상 간첩’이 되었고, 1980년 11월 이런 사실이 드러나 정보기관에 체포돼 처벌받은 것이다.

정씨 가문을 휘감은 1980년대 초의 이 공안 사건은 비극의 단면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그리고 분단은 전남 보성의 한 일가를 정면으로 관통한다. 봉강 일가는 이순신의 종사관을 지낸 반곡 정경달의 후손임을 자랑스러워한다. 400년이 넘은 고택인 봉강의 생가 ‘거북정’의 사랑채에는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勿爲歷史罪人)’는 가훈 족자가 걸려 있다. 집안이 소유한 전답이 300여만 평에 이를 정도로 부농이었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봉강은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한학을 배웠고, 나중에 독학으로 신학문을 공부했다. 동생 정해진은 경성제국대학과 동경제국대학 대학원을 다녔다.

어머니 윤초평 여사와 함께한 봉강 형제. 맨 왼쪽이 정해룡, 맨 오른쪽이 동생 정해진이다. ⓒ 도서출판 길 제공.

일찍부터 집안의 가장 역할을 맡게 된 봉강은 김성수의 보성전문학교에 거액을 기부했다. 스물다섯 살이던 1937년에는 가난한 농민들이 다닐 수 있는 4년제 학교 양정원을 세웠다. 무상교육이었다. 인쇄소와 양조장을 운영해 돈을 벌었는데, 봉강은 거액을 가져가면서도 용처를 밝히지 않았다. 여러 정황을 볼 때 독립운동자금으로 쓰였을 거라는 추측이 나온다. 그가 항일독립운동을 위한 비밀자금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해방 이후에 그는 노비문서를 없애고, 농사와 집안일을 거들던 17가구에게 살 집과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주었다. 당시로서는 무척 드문 일이었다. 정씨 일가는 흉년에 곡식을 나누기도 했다. 온화한 성품과 이런 내력으로 지역에서 명망이 높았다.

해방 이후에는 몽양 여운형과 정치적 노선을 함께했다.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세우기 위해 우익 세력과도 협력해야 한다고 봤다. 봉강은 건국준비위원회 활동에 참여했다. 여운형이 이끈 근로인민당에서 재정부장을 맡는 등 혁신계 정당 활동에 적지 않은 자금을 지원했다. 그 또한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 등 역사적 격랑이 정씨 일가를 덮쳤다. 현대사의 질곡에서 일가 8명이 죽고, 37명이 투옥되었다. 동생 정해진은 사회주의계 항일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1950년 북으로 갔다. 앞서 언급한 봉강의 숙부 정종희는 빨치산에 가담했다가 토벌대의 총알이 눈에 스치면서 실명했다. 봉강 본인도 ‘근로인민당 재건기도 사건’ 등으로 구속되었고, 이후 경찰의 감시를 당해야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에는 학비가 없어 아들 정길상씨가 국비로 운영되는 목포해양고로 진학해야 했을 정도로 가세가 기울었다. 그리고 1980년, 보성가족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파란만장한 가족사만큼이나 〈정해룡 평전〉도 출간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었다. 봉강의 7남5녀 가운데 6남인 정길상씨는 부친의 생애를 평전으로 펴내고 싶었다. 언론학자 김민환 고려대 명예교수가 2021년 봉강의 삶을 다룬 소설 〈큰 새는 바람을 거슬러 난다〉를 펴낸 이후에도 ‘평전’을 갈망했다. 1988년 출소한 정씨는 2007년께부터 자료를 모으고, 여러 주변 인물을 인터뷰해 기록을 쌓아갔다.

전남 보성에 있는 '정해룡 생가' 거북정 전경. ⓒ 도서출판 길 제공

2019년 정길상씨는, 김재규 평전 〈바람 없는 천지에 꽃이 피겠나〉 등 여러 논픽션을 쓴 문영심 작가에게 집필을 제안했다. 27년 동안 방송작가를 하며 다큐멘터리 작업을 많이 한 논픽션 분야 베테랑이었지만 고민스러운 대목이 있었다. “정해룡 본인과 관련된 직접 자료가 적었다. 공안 사건 관련자들이 대개 그렇듯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서신 등의 자료를 정길상씨가 다 태워버렸다고 하더라. 자료를 없앤 걸 그는 무척 후회했다.” 고민 끝에 문 작가는 집필하기로 결정했다. 대구 10월 항쟁, 제주 4·3, 여순 사건 등 근·현대사 사건과 몽양 여운형 등의 활동을 취재해 보강했다. 역사적 사실 위에 정해룡 일가의 삶을 기록했다. “해방·분단의 역사에 관심이 많다. 이분들의 이야기가 분단의 역사를 자세히 볼 수 있는 어떤 계기가 될 것 같았고,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는 점이 나에게는 제일 큰 성과였다. 배경이 되는 역사적 사건을 이해해야지 정해룡 일가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기도 하다.”

자료 모으고 17년 만에 나온 책

비교적 빨리 초고를 마쳤지만 출판까지 시일이 오래 걸렸다. 일제강점기부터 역사적 시련을 겪은 보성의 명문가라고 하지만 실제 간첩으로 처벌받은 이력 때문에 출판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현재의 출판사(도서출판 길)로 정해지고, 편집자와 소통하면서 원고를 여러 번 수정했다. 정길상씨가 자료를 모은 지 17년, 문영심 작가가 처음 시작하고 5년 만에 책이 출간되었다.

<정해룡 평전>(문영심 지음, 도서출판 길 펴냄)

봉강 일가의 삶을 잘 알던 사회 원로들이 ‘봉강정해룡평전출판기념회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김민환 고려대 미디어학부 명예교수, 김태일 몽양여운형선생기념사업회 이사장, 김학민 경기아트센터 이사장,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 박준영 전 전남도지사, 염동연 전 의원, 염무웅 문학평론가,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 이부영 전 의원, 표완수 전 한국언론진흥재단 이사장, 한충목 한국진보연대 상임공동대표, 한홍구 성공회대 석좌교수, 함세웅 신부 등이 함께했고, 10월31일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출판기념회를 며칠 앞두고 만난 문영심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정해룡은 투쟁하는 혁명가가 아니라 인품 좋은 선비라고 느껴진다. 지역에서 선비의 도리를 다하며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인데, 역사의 격랑에 휩쓸리게 되었다. ‘역사에 죄를 짓지 말라’는 가훈을 지키려던 사람이었는데 사후에는 반역죄인으로 몰렸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아이러니한 경우가 아닌가 싶다.”

차형석 기자 ch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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