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알아? 넘어져도 계속 자라거든 [비장의 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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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리셰(cliche)가 싫었다.
'내가 아는 세상' 말고 '나도 모르는 세상'에서 소재를 찾으면 뭔가 새로운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어느 포르노 배우를 알게 되었다.
"내가 왜 이 나무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넘어졌는데도 계속 자라거든." 숀 베이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같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넘어져도 계속 자라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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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숀 베이커
주연: 마이키 매디슨, 마크 아이델슈테인
클리셰(cliche)가 싫었다. 스테레오타입(stereotype)도 피하고 싶었다. 남들 영화에서 다 본 것을 내 영화에서 또 보고 싶진 않았다. ‘내가 아는 세상’ 말고 ‘나도 모르는 세상’에서 소재를 찾으면 뭔가 새로운 게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쯤 어느 포르노 배우를 알게 되었다. 그의 동료들을 만났고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가정환경이 불우해서, 먹고살 방법이 없어서, 빚과 계약에 발목이 잡혀서,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게 되었으리라 짐작하곤 했다. 아니었다. 그런 사람도 더러 있지만 아닌 사람이 훨씬 많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선택하는 직업이었다. 알면 알수록 ‘내가 모르는 세상’인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이젠 한번 만들어볼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보지 못한 영화’를 ‘내가 보고 싶은 방식’으로?
그래서 만든 네 번째 장편영화 〈스타렛〉(2012)은 주인공이 포르노 배우. 우연히 알게 된 동네 할머니와 서서히 친구가 된다. 다음 영화 〈탠저린〉(2015)의 두 주인공 모두 흑인 트랜스젠더 성 노동자 여성. 시스젠더 여자와 바람난 남자친구 잡겠다고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칸 영화제 감독주간 초청작 〈플로리다 프로젝트〉(2017)에서 주인공 꼬마 무니의 엄마는 아이 몰래 성매매로 돈을 벌고, 칸 영화제 경쟁부문 진출작 〈레드 로켓〉(2021)의 주인공은 로스앤젤레스에서 포르노 배우로 일하다 고향 텍사스로 돌아온 남자다.
여덟 번째 장편영화 〈아노라〉(2024)에서도 주인공은 역시 뉴욕 맨해튼의 스트리퍼. 러시아 재벌 2세의 성매매 파트너가 되었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는데, 어떻게든 그 결혼을 무효로 만들고 싶은 남자의 집안과 홀로 ‘맞짱’뜨는 이야기. 언제나처럼 “시종 유머를 잃지 않는 연출”로, 이번에도 역시 “정말 감성적(emotional)이지만 절대 감상적(sentimental)이지 않은” 영화를 만들어냈다. 올해 칸 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무대에 올라 이렇게 말했다.
“나의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세상의 편견을 없애는 데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이 성 노동자를 보다 긍정적인 관점에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상은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성 노동자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탠저린〉을 찍은 뒤에도, 〈플로리다 프로젝트〉를 만든 뒤에도 그는 말했다. “그들이 더 흥미로워서가 아니라 그동안 덜 재현되었기 때문에” 주인공으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주말 저녁 들뜬 마음으로 극장을 찾는 관객에게 그들의 실상을 정직하게 다룬 영화 좀 봐달라고 부탁하는 건 솔직히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파격적인 창의성을 발휘해야”만 한다고. 그래서 색깔은 과감하게, 음악은 비트 있게, 수다는 끊임없이. 한마디로 지루하지 않게! 그게 바로 숀 베이커 스타일.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대사는 이거. 잡초만 무성한 공터 한복판, 옆으로 쓰러져 있는 나무에 걸터앉아 무니가 하는 말. “내가 왜 이 나무를 제일 좋아하는지 알아? 넘어졌는데도 계속 자라거든.” 숀 베이커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도 같다. 그의 영화 속 인물들은 넘어져도 계속 자라거든. 생명력이 넘치거든. 아노라(마이키 매디슨)가 예외일 리 없지.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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