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집게, 끈갈피, 타이머, 기화펜…책으로 손길 이끄는 ‘독서템’ [ESC]
다른 색·크기 인덱스 붙이고, 트래커에 생각 기록하며 ‘독서력 업’
효과적인 독서 돕는 ‘독서템’…“독서템 만지고 싶어” 책 더 가까이
“MZ세대, 독서도 재미·개성있게”…독서 앱·전자책도 ‘도움 꿀템’
서른살 성시우(필명)씨는 읽고, 쓰는 사람이다. 문학을 전공한 대학 시절부터 책에 죽고 책에 살았다. 출근 직전에도 타이머를 맞추고 책을 읽는 그의 직업은 편집기자다. 유튜브 채널 ‘댓시옷’ 을 운영하는 10개월 차 ‘북튜버’이기도 하다. 지난 3일 서울 송파구에 있는 성씨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집 벽면에는 천장 바로 아래까지 각종 인문·예술 분야 서적이 틈 없이 꽂혀 있었다. 소설을 써 문예지 투고까지 할 만큼 텍스트에 진심인 성씨. 그는 책을 더 잘 읽기 위해, ‘독서템’을 쓴다. “(페이지 표시 용도인) 인덱스 스티커와 트래커(독서기록장)는 옛날부터 써왔고요, 나머지는 2~3년 전부터 차츰 쓰기 시작했어요.” 성씨는 그렇게 말하며 제법 묵직한 독서 바구니를 책상에 올렸다. “1년에 책을 100권 정도 읽는다”는 성씨의 ‘비기’가 그 안에 있었다.
“1년 50~70권→100권 독서량 늘어”
‘독서템’은 편리하고 효과적인 독서를 돕는, 모든 종류의 보조 도구를 통칭하는 ‘독서 아이템’의 줄임말이다. 독서대·조명·문진·책갈피·인덱스는 ‘전통의 강호’였다. ‘책을 읽는 것이 멋지다’는 의미의 ‘텍스트 힙’이 유행하는 최근에는 타이머·북집게·전자책·애플리케이션·북커버·독서링 등이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독서템은 때때로 특정 책이나 작가를 주제로 한 키링·티셔츠 등 ‘독서 굿즈’와 함께 묶이기도 한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판매되는 물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서템을 쓰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독서를 더 잘하기 위함이라는 점에서 소유나 장식을 목적으로 한 굿즈와는 구별된다. 각자의 독서 습관에 맞춰 ‘주력템’이 결정된다.
성씨의 습관은 ‘기록’이다. 읽은 내용이 휘발하지 않는 게 우선이다. 그러기 위해 가장 많이 쓰는 건 인덱스인데, 붙이는 데에도 법칙이 있다. “내 마음에 드는 부분에는 붉은 인덱스를, 마음에 들지 않아도 이야기 흐름에서 중요한 부분에는 푸른 인덱스를 붙여요. 그 강도가 클수록 인덱스의 크기도 커지고요.” 페이지를 펼치지 않고도 문장을 떠올리는 그만의 요령이다. 그 밖에도 성씨는 반투명 메모지, 노트, 트래커를 오가며 기록하는 습관을 들였다. “한해에 50권, 70권 정도 읽었는데, 작년 100권까지 독서량이 늘었어요.” 책을 펼쳐두고 글씨를 쓰기 위해선 책이 덮이지 않게 잡아줄 아이템도 필요하다. 그때 성씨는 길고 판판한 북집게를 책 끄트머리에 집어둔다. “자꾸 미끄러지는 문진에 비해 실용적”이라고 한다.
대학생 시절 친구들과 독서 모임을 만들면서 꾸준히 책을 읽어온, 경기 양주시에 사는 초등학교 교사 박예섬(24)씨도 다양한 독서템의 보유자다.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책 표지를 가릴 수 있는 북커버(책 바깥에 씌우는 주머니), 도서관 책에 밑줄을 그을 수 없으니 잠시 붙여두는 롱인덱스(특정 문장 위에 붙여 강조 표시를 하는 가늘고 긴 스티커) 등을 쓰고 있어요.” 그중에서도 ‘최애템’은 책갈피다. 끈갈피, 인형책갈피, 엽서형, 클립형 등. 이제껏 박씨의 손을 거쳐간 책갈피만 무려 100여종이다. 박씨는 “재밌는 책은 그냥 읽어도 잘 읽힌다. 그런데 내용이 그냥 그런 책들도 마음에 드는 독서템을 쓰면 한번 더 눈길이 간다. 독서템을 만지고 싶고, 책갈피를 옮기고 싶어서 자주 손이 간다”고 했다. 숱한 책갈피 중 하나를 고르는 기준은 바로 ‘깔맞춤’. 표지색과 책갈피 디자인이 어우러질 때 만족감이 커진다고 박씨는 말했다.
직장인 김미정(가명·경기 의정부)씨는 책을 읽으며, 그때그때 필요한 독서템을 하나둘 모아 현재 10종류 이상을 사용 중이다. 문구류 소개 유튜브 채널 ‘도도앤미미’를 운영하는 문구 고수인 그가 1순위로 꼽은 건 인덱스 겸 책갈피로 사용하는 북다트다. 작은 클립처럼 생긴 북다트는 끼고 빼는 것이 간편해 “밑줄을 그을 수 없는 책에 자주 쓴다”고 했다. 또 김씨는 “‘포모도로 기법’(25분간 집중해서 독서나 일을 한 다음 5분간 휴식하는 방식)으로 타이머를 쓰면서 집중도가 확 늘었다”고 만족감을 나타냈다.
김씨와 성씨의 것을 포함해, 독서템으로 곧잘 쓰이는 타이머는 남은 시간이 색깔 면으로 표시돼 눈으로 시간이 줄어드는 면적을 확인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김씨가 요즘 빠진 ‘신상템’은 종이에 쓰고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는 다이소에서 구입할 수 있는 기화펜이다. “부담 없이 낙서나 필기를 하면서 읽을 수 있잖아요. 떠오르는 생각을 바로 적으니 책 읽는 재미가 늘었죠.” 중요한 메모는 노션 등 앱이나 종이노트 등에 따로 기록한다. 예쁜 문진은 소셜미디어(SNS)에 사진 업로드용으로 활용하며 실제 책을 읽을 때는 독서대가 편하다고 한다.
독서 앱 통해 취향 공유와 소통도
독서템의 인기는 ‘책 읽는 엠제트(MZ)세대’ 사이에서 상승하는 추세다. 키워드 분석 플랫폼 블랙키위에 따르면, 네이버의 ‘독서템’ 검색량은 지난해 11월 120회에서 올해 10월 960회로 약 1년간 8배가 늘었다. 검색 연령대로는 20대(41.8%)와 30대(29.4%)가 전체의 약 70%를 차지했다. 젊은층이 많이 쓰는 소셜미디어인 유튜브, 인스타그램, 틱톡에도 지난해와 올해 ‘독서템 추천’ 게시물이 많이 올라왔다. 온·오프라인 쇼핑몰은 물론 알라딘, 교보문고 등 서점에서도 독서템을 판다. 알라딘 굿즈팀 담당자 김재욱씨는 “주 구매 연령층은 20~30대 여성”이라며 “국내 일러스트 작가, 캐릭터 콜라보, 전통 문양 등 다양한 책갈피의 판매율이 높은 편”이라고 했다. 한편 엄지에 끼워 책을 펼치는 데 쓰는 독서링은 장시간 사용 시 손가락이 아파 잘 안 쓰게 된다는 게 사용자들의 공통된 말이었다.
엠제트세대가 이처럼 각양각색 독서템을 쓰는 이유는 ‘재미’와 ‘개성’이 꼽힌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기본적으로는 편안함을 위해 독서템을 쓰지만 엠제트세대는 가방, 신발도 꾸미잖나. 책을 볼 때도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예쁜 문진이나 책갈피를 쓰면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어 “외부에 나만의 독특한 개성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고 했다.
전자책 비중도 커지고 있다. 지난 4월18일 발표된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 국민독서실태조사’를 보면, 성인 전자책 독서량은 2019년 1.2권에서 2023년 1.9권으로 상승했다. 성시우씨와 김미정씨도 모두 전자책을 애용한다. 책보다 가볍고 휴대전화와 달리 눈을 피로하게 하지 않기에 출퇴근길, 자기 전 등 상시 사용 가능하다는 게 이들의 말이다. 도·시립 전자도서관을 이용하면 무료로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고등학생 때부터 책을 즐겨 읽어온 개발자 이가현(24·경기 고양)씨도 전자책을 애용한다. “한 손에 딱 들어오는 크기에 터치만 하면 페이지가 넘어가기에 독서 속도가 빨라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책의 종류에 따라 전자책이 더 적합한 때도 있다고. “흔히 ‘벽돌책’으로 불리는 두꺼운 장편소설을 종이책으로 읽게 되면 다소 버겁게 느껴지기도 해요. 그런데 전자책으로 보면 실제 두께를 가늠할 수 없으니, 부담이 덜해 쉽게 금방 읽을 수 있어요.” 반면 철학서는 종이책으로 읽는다. “철학은 꾸준히 오래 생각하게 하는 주제가 많아서인지 여러번 다시 보게 되더라. 메모도 하고 밑줄도 그으며 생각을 정리해놔야 해서 종이책으로 보는 게 좋다”고 했다.
‘독서의 적’으로 악명 높은 휴대전화도 잘만 쓰면 독서 꿀템이다. 다양한 독서 앱을 통해 독서량, 효율에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성시우씨는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등 짬을 내어 요약된 책 내용을 ‘쇼트북’ 형태로 제공하는 앱 ‘에픽어스’를 쓴다. “제가 읽은 책 위주로 보면서 이해한 내용을 확인하기도 하고요, 새로운 책을 추천받기도 해요. ‘에픽어스’에서 본 게 흥미로우면 ‘밀리의 서재’에서 책을 읽는 식이죠.” 박예섬씨는 독서기록 앱 ‘북적북적’을 쓴다. 읽은 책을 ‘탑’처럼 쌓으며 좋아하는 구절을 기록하는 용도다. “책을 입력하는 것 자체로도 동기부여가 됐어요. 또 책을 많이 기록할수록 아이콘이 계속 바뀌는데, 그걸 모으는 재미가 있어서 계속 쓰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타인과 취향을 공유하고 커뮤니티를 통해 소통할 수 있는 앱 ‘리더스’, 독서관리 앱 ‘북플립’ 등이 있다.
“쌓일수록 단단한 나 만들어줘”
최근 성황리에 막을 내린 책 관련 행사들도 엠제트 독서인의 ‘읽는 맛’을 돋웠다. 지난 6월 ‘2024 서울국제도서전’에 다녀온 성시우씨는 “책을 몇권 이상 사면 주는 티셔츠, 그물 가방 등의 굿즈를 받으려고 책을 더 샀고, 더 읽게 됐다. 평소 잘 몰랐던 중소 출판사의 책을 접할 기회였다”고 했다. 주관사인 대한출판문화협회 집계에 따르면, 올해 처음 정부 지원 없이 개최된 이 행사에는 지난해보다 2만명 많은 15만명 관람객이 다녀갔다.
야외 독서도 활기를 더했다. 서울시는 올해 4월부터 지난 10일까지 ‘서울야외도서관’을 열어 서울광장·광화문광장·청계천에서 시민들이 책을 읽을 수 있도록 했다. 함께 독서 모임을 하는 친구들과 책을 읽으러 광화문광장에 갔던 박예섬씨는 “서울 한복판에서 수많은 사람이 책 읽는 모습을 보니 다시금 독서 의지가 타올랐다. ‘나도 더 열심히 읽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이가현씨도 전자책을 들고 야외도서관에 자주 갔다. “한번 가면 몇시간 동안 있게 되는데 전자책이 있으면 읽고 싶은 모든 책을 읽을 수 있어요. 또 저녁에 책을 읽을 때도 독서등이 필요하지 않아 편했습니다.” 오지은 서울도서관장은 “올해 서울야외도서관을 찾은 방문객이 290만명이 넘었다”고 했다. 지난해 170만명을 크게 웃도는 인원수다.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은 엠제트 독서인들의 ‘쓸 맛’과 ‘말할 맛’을 더했다. 성씨는 “소설 습작하며 ‘내 길 아니다’라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한강 작가 수상 소식을 듣고 욕심이 생겼다. 단편소설을 써보자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주변에도 글 쓰고 싶단 사람이 많아졌다”고 덧붙였다. 또 박예섬씨의 독서 모임에서는 한강 작가의 수상 이후 그의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를 연달아 읽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짧아지고 빨라지는 ‘쇼트’의 시대. 길고 느리게 책을 읽는 이들은 저마다 쉬이 휘발되지 않는 경험을 쌓는다. 대학 시절 외로움을 이기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다는 성씨는 “책을 읽으면서 좋은 친구를 얻은 듯했다. 위로되는 문장을 읽으면 우울함에 갇혀 있지 않고 벗어날 수 있었다. 코로나 때도 집에 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독서로 외로움을 극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휴대전화를 하고 흥미 위주의 영상을 보는 건 시간 낭비란 생각이 많이 들어요. 책을 많이 읽으면서 집에 있는 소중한 시간을 낭비했다고 자책하지 않게 됐어요.” 성씨의 말이다.
박예섬씨는 “인스타 릴스, 쇼츠도 많이 보는데 계속 보면 얻는 게 없고 시간을 버린다는 느낌만 들어서 돌고 돌아 책을 읽게 된다”고 했다. 이어 “같은 책이라도 다시 읽을 때마다 생각이 달라지는 점, 잊고 있던 추억이나 생각이 갑자기 떠오르는 게 책의 매력”이라고 했다. 김미정씨는 “책은 진입장벽이 낮다. 음악, 미술은 어느 정도 재능이 필요한데 독서는 글자만 읽을 수 있으면 되잖나. 도서관을 이용하면 비용적 부담도 없는 편”이라고 했다. “유행에 휩쓸리고 순간 재미로 흘리는 쇼츠에 비해 쌓이면 쌓일수록 단단한 나를 만들어줘요.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멋진 취미입니다.”
유해강 허프포스트코리아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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