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옥 갇힌 이유 모르는 나치 판사…이 시대의 ‘법비’와 닮았다 [책&생각]
바이마르헌법 제48조, 독재 씨앗
히틀러와 헌법 동일시한 법률가들
정치이데올로기에 굴복한 법의 말로
히틀러의 법률가들
법은 어떻게 독재를 옹호하는가
헤린더 파우어-스투더 지음, 박경선 옮김 l 진실의힘 l 2만3000원
독일 최초의 민주정이었던 바이마르공화국은 어쩌다가 최악의 전체주의 체제인 나치즘에 자리를 내주고 말았을까? 이것이 민주주의를 연구하는 이들의 질문이라면, 이 책의 질문은 좀 더 구체적이다. 나치즘과 같은 무도한 정권이 도대체 어떻게 학문적으로 훈련된 법률가들의 지지를 얻었을까?
오스트리아 빈대학의 윤리학·정치철학 교수인 헤린더 파우어-스투더가 쓴 ‘히틀러의 법률가들’은 나치즘을 지지하고 지탱한 법과 법률가들에 초점을 맞춘 책이다. 히틀러 제3제국의 사법제도를 단순히 ‘악법’이라 치부하는 데에서 더 나아가, 바이마르공화국 시기부터 대량학살과 몰락에 이르기까지 나치즘의 법적 기반을 구체적으로 파고든다. 그 결과, “법이 정치 이데올로기에 굴복하다 보면 국가권력이 일반적인 도덕과 법 기준을 전부 위반해도 이를 막는 데 실패할 수 있다”는 교훈을 끌어낸다. 시간적으로나 지리적으로나 우리와는 거리가 있는 사례이지만, ‘법비’(법을 악용하여 사적인 이익을 취하는 무리)라 불러 마땅할 법률 전문가들이 전횡과 농단을 일삼는 이즈음 대한민국 현실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군주제가 없어지면서 권위주의 국가도 사라졌고 국가는 다양한 사회적 힘에 휘둘리게 됐다. 이런 식으로 국가는 퇴보 상태에 빠지고 순전히 형식적이었던 법체계가 이렇게 공회전을 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 뚜렷해졌다.”
나치의 법률가 중 한 사람인 에른스트 포르스토프는 1933년에 낸 저서 ‘전체국가’에서 바이마르공화국을 이렇게 평한다. 지은이는 이런 태도가 민주주의에 대한 전형적인 모독이자 왜곡이라고 지적한다. 포르스토프가 지지했던 나치야말로 바이마르공화국 시절 정치적 혼란의 주범이었음에도, 원인에 대한 분석은 없이 민주주의 자체를 문제 삼으면서 전체주의 질서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파우어-스투더는 오히려 바이마르공화국의 민주 헌법안에 독재 체제의 씨앗이 들어 있었고 그것이 히틀러의 집권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저명한 사회학자 막스 베버도 자문위원으로 참여해 1919년 8월11일 공포된 바이마르헌법에는 ‘독재조항’이라고도 불리는 제48조가 포함되어, 제국 대통령이 긴급명령을 통해 정치적 과정에 개입할 길을 열어 놓았다. 이 조항은 대통령이 긴급 상황에서 군대를 배치하고 기본적 시민권을 통제할 수 있게 했는데, 애초에는 극우파와 급진좌파의 영향력으로부터 공화국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였던 이 조항이 히틀러에게는 꽃길을 깔아 놓은 것과 마찬가지였다.
빌헬름 2세 황제의 퇴위 뒤 임시 연립정부 수장으로서 급진좌파 스파르타쿠스단의 혁명 시도를 유혈 진압한 사민당 출신 프리드리히 에베르트가 공화국 초대 대통령에 올랐고, 그가 죽은 뒤 1925년 보수 성향의 육군 원수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제2대 대통령이 되었다. 경제 불안과 정치 혼란이 이어지자 그는 1932년 5월 강경 보수주의자 프란츠 폰 파펜을 총리로 임명한 데 이어 1933년 1월30일에는 아돌프 히틀러를 그 후임으로 임명하고 불과 이틀 뒤에는 제국 의회를 해산하고 만다. “총리로서 히틀러가 처음 취했던 조치들은 그저 대통령 긴급명령을 통해 통치행위를 지속한 것이었기 때문에 정치적·법적으로 연속적이라는 인상을 주었다.” 3월5일에 마지막 다당제 선거가 치러진 뒤 공산당과 사민당이 불법화된 데 이어 우익 정당인 독일국가인민당조차 해산하면서 나치의 일당독재가 완성되었다. 힌덴부르크가 사망한 뒤 1934년 8월19일 실시된 대통령과 총리 직무 통합에 관한 국민투표에서 90%에 육박하는 득표율로 히틀러가 당선한 것은 바이마르공화국 종말의 형식적 완성이었다.
“나는 헌법의 수호자는 제국의 대통령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인 것의 개념’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나치의 정치철학자 카를 슈미트는 헌법 48조를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돌이켜 보면 어이없기만 한 히틀러의 집권을 두고 나치 법률가들은 ‘합법적 혁명’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히틀러를 헌법 자체와 동일시하는 법 이론을 마련한다. “지도자의 말씀이 모든 성문법에 우선한다”는 소위 ‘지도자 원칙’, 범죄는 실제 행위가 아니라 의도에 그 핵심이 있다는 법의 도덕화, 독일 혈통이 아닌 ‘이질적인’ 개인들을 독일의 법체계 밖으로 내친 ‘뉘른베르크법’ 등이 대표적이다.
히틀러가 입법권과 사법권을 독점하고 ‘특별명령’ 형식으로 내린 사형집행 명령이 관보에 공개되지 않고 구두 지시 형태로 행사되었다는 점은 나치 사법 체계의 가장 큰 맹점이었다. 1936년 2월에 통과된 ‘게슈타포법’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보호 의무를 국가에 대한 보호 의무로 대체함으로써 정치가 법을 장악하는 길을 활짝 열어 놓았다. 그해 6월 히틀러는 나치 친위대장 하인리히 힘러를 경찰청장에 임명해 게슈타포와 강제수용소에 대한 전권을 맡겼다. 히틀러가 임명한 판사들을 힘러가 감독했다.
히틀러의, 히틀러에 의한, 히틀러를 위한 것이었다고나 할 나치 사법 체계에서 친위대 판사였던 콘라트 모르겐과 같은 사례는 흥미로운 예외에 속한다. 지은이는 ‘콘라트 모르겐: 어느 나치 판사의 양심’이라는 책을 공저로 낸 바 있는데, 나치 당원이었던 모르겐은 강제수용소 내의 부정부패와 ‘불법적인 살인’ 사건 등을 수사해 사령관 다섯 명을 체포하고 그중 둘은 사형에 처하기까지 했다. 종전 뒤 그는 미국 심문관에게 “내가 왜 감옥에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나는 범죄자였던 적도 없고 당신이 지금 하는 것과 똑같이 전쟁범죄에 대한 수사를 해왔던 사람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우어-스투더는 모르겐의 양심이 완전히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고 평가하면서도 그가 어디까지나 나치 친위대의 기준에 근거해 사안을 판단했고 무엇보다 나치의 침략과 전쟁범죄에 대해 명확히 비판한 적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그의 사법 활동에는 심각한 결함이 있었다”는 결론을 내린다. 지금 이곳의 ‘법비’들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될 결론이라 하겠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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