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가을의 온몸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4. 11. 15. 0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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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요즘 같은 늦가을이면 이문세의 '그녀의 웃음소리뿐'을 흥얼거린다. "어느 지나간 날에 오늘이 생각날까? 그대 웃으며 큰소리로 내게 물었지. 그날은 지나가고 아무 기억도 없이 그저 그대의 웃음소리뿐… 어떤 의미도 어떤 미소도 세월이 흩어가는 걸…" 젊은 남녀가 데이트 중이다. 여자가 남자에게 묻는다. "한 20년쯤 지나도 오늘이 생각나겠지? 그때 우리에게 오늘은 어떤 의미로 남을까?" 세월은 화살 같아 어느새 20년이 훌쩍 지나고 그의 곁에 그녀는 없다. 사랑의 기억과 애틋한 약속들, '의미'를 지닌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시각적 인상인 동시에 일종의 상징 언어인 미소 또한 흩어진다. 긴 세월이 흐르고 남은 것은 그저 '웃음소리'뿐이다. 의미를 지닌 '말'이 아니라 오직 소리라는 감각만 남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무것도 감각되지 않았다면, 아무것도 배우거나 이해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감각이 의식을 추동한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감각의 중요성은 중세에 와서 신체를 의식에 종속되는 하위기관으로 여기며 육체와 정신을 이원화시킨 이른바 심신이원론에 의해 부정된다. 그러나 20세기 메를로 퐁티는 "신체는 자연적 자아이자 말하자면 지각의 주체"라고 선언했다. 이는 감각이 의식의 주체가 된다는 파격적인 선언이다.

감각은 사유보다 앞서는 것이다. 길을 가는데 낯선 행인이 대뜸 내 뺨을 때렸다고 가정해보자. 어떤 연유에서 상대가 나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인지 의문과 억울한 마음, 분노, 공포는 모두 지각에 의한 사유 반응이다. 그런데 이 사유 반응이 작동하기 전에 우리의 감각이 먼저 반응한다. '아프다', '따갑다', '화끈거린다'는 육체의 통각이 그 어떤 사유 판단보다 앞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처럼 사유는 감각 다음에 온다.

시인 말라르메는 산문을 도보로, 시를 춤으로 비유했다. 도보는 도착이라는 목적이 있다. 하지만 춤에는 목적이 없다. 춤은 행위라기보다 존재의 내부에서부터 솟구쳐 오르는 어떤 힘에 의해 자연발생하는 하나의 현상이다. 춤은 춤 그 자체가 수단이자 목적일 뿐 어떠한 의도가 없다. 보행과 춤에 빗대어 산문은 이해라는 목적지에 도달해야 하는 글이고 시는 감각의 글이라 할 수 있다. 시는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감각하는 것이다.

10년 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여행 가서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 무용인 플라멩코를 본적이 있다. 중간 중간 외치는 스페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춤의 뜨거움은 지금까지도 생생히 감각되어 있다. 춤을 추는 무용수는 온몸으로 이렇게 묻는 것만 같았다. "이해되고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감각되어 남을 것인가"라고.

몇 해 전 나는 호구지책으로 배달 라이더 부업을 한 적 있다. 강의나 집필 활동을 더 할 수도 있지만 몸으로 하는 노동을 택했다. 활자와 의미의 세계, 이해와 사유판단의 세계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만뒀지만 배달 라이더로 살았던 몇 개의 계절을 나는 인생의 아름다운 시절로 간직하고 있다. 스쿠터를 타고 바람을 가르면 기분이 좋았다. 이 세상에서는 잊을 수 없을 아름다운 저녁놀도 배달 길에 본 것이었다. 살면서 그런 빛깔을 몇 번이나 볼 수 있을까. 방 안에서 글 쓰고 책 읽고 있었다면 못 봤을 텐데, 그 아름다움을 몰랐을 텐데.

우리는 너무 많은 이해를 요구받으며 살고 있다. 세상에는 이해하고 파악해야 할 지식과 정보보다 감각해야 할 빛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질감이 훨씬 많다. 몸의 직접적 체험을 통해 감각하는 세계에 비해 지식과 정보만으로 이해하는 세계는 그 질량과 부피가 빈곤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풍을 감각하기 위해 오늘 관악산에 다녀왔다. 가는 길의 햇살과 바람과 나무 냄새를, 설렘으로 부푸는 가슴과 행인들의 웃음소리와 안양천에 비친 산그림자를 몸으로 느끼면서. 아직 감각할 가을이 많이 남아 있다. 가을의 온몸이 당신의 온몸을 기다리는 중이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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