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돈선의 예술인 탐방지도 - 비밀의 방] 79.어느 화가가 훔친 여름-홍천 향토 화가 김영진

최돈선 2024. 11. 15. 00:07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백발의 소년이 그려낸 여름 풍경 ‘푸른빛 동심의 세계’
강원대 미대 졸업 후 미술교사 근무
귀향 후 실내장식 종사 30여년 흘러
2015년부터 그룹전 작품 출품 시작
겸재진경미술대전 등 3회 연속 특선
쌍둥이 손주 바라보며 일깨운 동심
신선하고 따뜻한 색감으로 표현
▲ 야외에서 작품을 그리고 있는 김영진 작가      ▲ 옥탑방 작업실에서 만난 김영진 작가

홍천에 살고 있는 김영진 화가의 집을 찾아갔다. 여름이 끝나고 가을이 성큼 깊은 곳에 다다랐다. 그는 세모꼴의 옥탑방에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다. 겉으로 보기에 옥탑방은 요정이 사는 버섯집처럼 작아 보였다. 붉은 벽돌의 외벽에 붙은 나무 계단을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문을 밀자 의외로 안은 꽤 넓어 보였다. 나무 탁자와 네 개의 의자, 양쪽 기울어진 벽면으로 기대어진 그림, 작은 탁자에 놓인 물감과 테레핀유, 네모 난 동쪽 창이 나를 묵묵히 맞이했다. 창은 또 하나의 그림을 보여주고 있었다. 파스텔처럼 아련히 번지는 풍경을.

머리가 눈처럼 흰 화가는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창가로 이젤 위에 놓인 캔버스엔 새 한 마리가 날개를 퍼덕이고 있었다. 아마 화가의 마음속 먼 곳에서 날아온 새일 터였다. 화가는 늘 공손했다. 조심스럽고, 잠시 생각을 더듬다가 조곤조곤 이야기하곤 했다. 옛 기와집 폐가를 헐어 손수 자신이 지은 집이라 했다. 그 슬래브 지붕 위에다 암스테르담식의 옥탑방을 올렸다. 아래층과 옥탑방은 완전히 분리되어 있었다. 오직 바깥의 계단만이 유일한 통로였다. 아내가 틈틈이 도왔을 뿐 사람 하나 안 사고 지은 집이었다.

세잔이 여름을 사랑했듯 화가는 여름을 사랑했다. 그 여름의 색채가 화가의 마음을 온통 물들였다. 겨울에도 그는 여름날의 초록 나무들과 봉숭아와 채송화, 그리고 숲에서 날아온 새를 그렸다. 지난여름은 뜨거웠다. 태양이 이글거렸고 지열이 후끈 대지를 달구었다.

그가 훔친 여름은 세월의 더께가 끼어 온갖 색채로 남았다. 30여 년을 지나오면서 화가는 그림 한 장 그리지 않았다. 먹고 사는 일과 아내와 둘이 여행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그냥 무심히 세월 보내기가 그저 좋았고, 아이들이 커가는 모습이 좋았고,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 결혼하여 또 아이들을 낳을 때까지 화가는 모든 일들이 다 좋았다. 그렇게 스스로 되어가고 스스로 변화하는 거라는 생각이 무심히 들었을 뿐이었다. 어느새 화가의 머리는 순백의 백발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화가가 되고 싶은 자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김영진이란 이름의 화가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신기한 일이었다. 새삼 자신의 이름이 눈물겨웠다. 청동빛이 되어 버린 자신의 이름. 그 지나온 세월 동안 김영진은 화가의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직업인으로서의 이름으로 살아왔음이 상기되었다.

그래 난 화가가 되고 싶어 했지. 1979년 강원대 미대를 졸업하고 군대 다녀와서 경기도 지평중학교 미술교사가 되었어. 그리고 3년 후 결혼했어. 결혼 전 몇 년간 아내와 편지를 주고받았었지. 편지나 엽서엔 그림이 그려져 있었어. 아주 잘 그렸어. 정말이지 난 화가와 사귀는 줄 알았다니까. 그런데 아내와 결혼 후 난 아내가 그림 그리는 걸 본 적이 없어.

고향에 와서 미술교사를 퇴직했지. 왜일까. 난 홀어머니 모시고 탄광지대로 갈 수가 없었어. 난 실내장식 일을 하기 시작했지. 건축붐이 일어 제법 잘 되었어. 수입이 선생봉급의 몇 배나 되었거든. 그렇다고 해마다 다 잘된 건 아니야. 몇 년 동안 푼푼이 돈을 모아서, 난 아내와 외국으로 떠나곤 했어. 오슬로의 뭉크를 만나러,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만나러, 오르세에서 폴 세잔을 만나러 말이지. 두브로브니크 민박집에 걸려 있던 연필 누드화가 지금도 잊히지 않아. 무언가 아련하고 가슴이 뭉클했거든. 그렇게 평범한 생활이 어언 30년 가까이 흘러갔지. 그래도 난 참 좋았어.

어느날 실내장식가 김영진은 화가 김영진을 조용히 불러보았다. 그림이 그리고 싶니? 라고 누군가 그의 마음속에서 물었다.


“김·영·진·은·그·림·을·그·린·다.”

이 한마디 한마디가 그의 마음속에 길게 메아리쳤다.

김영진 작가의 작품

2015년부터 2018년까지 그룹전에 한 점씩 출품하기 시작했다. 김영진은 드디어 화가의 길로 들어설 마음을 먹었다. 2017년은 세상에 그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국미술대전 특선과 더불어 겸재진경미술대전에서도 특선을 차지했다. 이듬해 강원미술대전에서 특선이 됨으로써 연속 3회 특선을 누렸다. 50이 넘어 다시 시작한 그림이었다. 과분하고 벅찼다. 2018년엔 강원미술대전 특선 기념으로 춘천의 카페 ‘느린 시간’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작은 공간일망정 김영진으로선 의미 있는 출발이었다.

여름이 오고 또 여름이 왔다. 아들 며느리가 쌍둥이 손주를 낳았다. 김영진은 할아버지가 되어 마냥 기뻤다. 아이의 앙증맞은 손을 만지고 또 맑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별이 수없이 반짝였다. 김영진은 아이의 손을 통해 세상을 그리고 싶었다.

 김영진 작가의 작품들         

김영진의 손이 점점 아이의 손이 되어갔다. 김영진의 눈이 점점 아이의 눈이 되어갔다. 점점 유치해지고 점점 색깔이 다양해졌다. 바람조차 색깔이 있었고, 여름산이 자신에게 물감을 들이부었다. 흐르는 내가 굽이치고 나무들이 쑥쑥 자라고 마을이 이상하게도 놀라운 이야기를 쏟아놓았다.

2019년 홍천문화예술회관을 빌려 크게 전시를 벌였다. 40여 점이 넘는 그림들이 너른 공간을 꽉 채웠다. 그런데 놀랍게도 거의 판매되었다. 자신의 그림이 완판에 가깝게 판매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한 그였다.

사람들은 이렇게 동심이 넘치고 맑은 그림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신선하고 따뜻한 색감이 넘쳐흘렀다. 어린이가 그린 듯 그림들이 원근법을 무시한 비대칭임에도 자연스러웠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자유로웠다. 마치 그림 안에 들어가 그림의 한 부분을 차지한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겸재진경미술대전 출품작

작년 여름 김영진은 작은 세모집을 마련했다. 그곳에서 올해의 여름을 뜨겁게 견뎠다. 아니 즐겼다. 이제 여름을 훔치는 일이 그의 직업이 되었다. 여름은 김영진에게 풍요로운 동화와 행복을 선사했다.

폴 세잔의 풍경에서 이제는 샤갈의 꿈꾸는 마을을 하나하나 그려나갔다. 사실적이 아니어도 좋았다. 꿈을 꾸고 내 안에 색을 받아들이고 그 색이 다시 다른 색을 불러와 어울렸다. 그 여름은 눈부셨다. 뜨겁게 정열적이었다. 여름을 훔치면서 김영진은 새로운 눈을 떴다.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이 있어요. 그 애들이 저를 인도합니다.”

헤어질 때 석양이 김영진을 비추었다. 얼굴을 찡그렸으나 표정이 마냥 아이처럼 행복해 보였다. 그는 이미 어린아이가 되어 있었다. 시인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김영진 #최돈선 #탐방지 #옥탑방 #마음속

Copyright © 강원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