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부통령으로 돌아온 '힐빌리의 아들'
[박꽃의 영화뜰]
[미디어오늘 박꽃 이투데이 문화전문기자]
“한심한 힐빌리 자식! 멀쩡한 치아도 없는 주제에”
“약쟁이 XX년!”
“우리 엄마 그렇게 부르지 마 이 새끼야!”
믿을 수 있는가. 이 대사가 차례로 엄마, 아빠, 아들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라면. 4년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론 하워드 감독의 영화 '힐빌리의 노래'(2020) 속 한 장면이 보여준 모습이다. 신의성실을 맹세한 부부와 피를 나눈 자식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상황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영 거북하게 다가오는 이 대목은, 놀랍게도 실화에 기반해 연출됐다. 올해 미 대선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로 함께 뛰며 부통령 자리에 오른 J.D 밴스가 바로 이 장면 속 아들 입장이었다. 영화는 그가 2016년 출간한 동명의 회고록을 영화화했다.
영화와 책 제목에 들어간 '힐빌리'(Hillbilly)란 게 뭘 뜻하는 걸까. 우리 관객에게는 대체로 낯선 이 단어를 한국 식으로 의역하자면 '흙수저'가 그나마 적당할 것 같다. 단순히 가난하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부모는 경제활동의 의지를 잃었고 자식은 제대로 된 교육과 훈육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된다. 그런 상황에서 생길 수 있는 수많은 가정문제까지 내포한 용어가 힐빌리다. 주로 미국의 쇠락한 공업지대 러스트벨트에 사는 소외된 백인 노동계층과 그 가족 구성원을 뜻한다. 돈이 없고, 몸은 상했으며, 높은 확률로 약물에 중독됐거나 가정 내 폭력을 휘두르는 이들이다. 이런 어른을 거울삼아 자라나는 자식 세대의 미래도 덩달아 암담하다.
J.D 밴스는 당시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나는 백인이긴 하나, (뉴욕 등) 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인 와스프(WASP)는 아니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 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 미국인들은 이른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 레드넥, 화이트 트래시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른다. (…) 저조한 사회적 신분 상승에서부터 빈곤과 이혼, 마약중독에 이르기까지 내 고향은 오만 가지 불행의 중심지다. (…) 통계적으로 나 같은 아이들의 미래는 비참하다. 운이 좋으면 수급자 신세를 면하는 정도고, 운이 나쁘면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
이 내용을 토대로 론 하워드 감독이 연출한 영화의 내용도 다르지 않다. 할머니(글렌 클로즈)는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엄마(에이미 아담스)를 낳았고, 엄마 역시 그렇게 아들(가브리엘 바쏘)을 얻었다. 한창 교육받아야 할 나이에 출산을 경험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할 기본자질도 갖추지 못한 채 저질 노동에 뛰어들어야 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신분상승은 먼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노력과 보상'이라는 건강한 연속 훈련에 노출되지 못한 이들은 손쉽게 쾌락을 얻는 술과 마약류에 중독되고, 그나마 있던 일자리마저 쉽게 그만두게 되며, 겉잡을 수 없이 무기력해진 삶은 '더 나은 인생'을 꿈꾸게 하는 의지 자체를 완전히 좀먹는다.
J.D 밴스는 그럼에도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했고, 실리콘밸리에서 투자회사를 운영하며 부를 이뤘으며, 2022년 오하이오주 연방상원의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된 뒤에는 이윽고 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다. 영화 '힐빌리의 노래'를 보면 그 예외적인 여정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척박한 여건 속에서도 자신이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도록 지켜준 강인한 할머니가 곁에 있었던 덕이다. 물론 그 역시 젊은 시절에는 자신의 딸을 혹독하게 취급했던 힐빌리였을 뿐이지만, 나이가 든 뒤에는 적어도 손주인 J.D 밴스의 삶 만큼은 자신들과 다르길 염원하며 엄격하게 훈육했다. 손주를 찾아온 약쟁이들에게 “다시 찾아오면 차로 밀어버리겠다”는 엄포를 놓는 일도 마다하지 않으며.
이토록 가난하고 소외된 힐빌리 출신인 J.D 밴스가 트럼프 대통령과 짝을 맺고 부통령 자리에 오른 사실이 의미하는 건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이 45대에 이어 47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되는 동안에도 미국의 '가난한 백인 문제'가 거의 해결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미국 인종이 흑인, 라틴, 아시안 등으로 다양하게 구성돼 있다고는 해도 여전히 전체 인구의 2/3을 차지하는 건 백인이다. 그러니 이들이 겪는 심각한 사회경제적 문제가 책으로 쓰이고 영화로 만들어지는 걸 넘어 대통령 선거의 결과까지 좌우하는 게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힐빌리의 아들'이 미국민의 일자리와 이득을 최우선에 둔 미국 우선주의를 주장하는 트럼프와 정치적으로 결합한 지금, 여러 문화콘텐츠를 통해 그 배경을 짐작해볼 수 있게 된 우리로서는 그 결과가 이 사회에 미칠 여파에 대응하는 일만이 남아있을 것이다.
Copyright © 미디어오늘.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파우치 사장’ 박장범 KBS 사내 찬반 투표, 95%가 ‘부적격’ - 미디어오늘
- IP카메라 해킹, 안방 영상 인터넷에…중국산 직구 대응은? - 미디어오늘
- ‘좀비버스: 뉴블러드’ 노홍철의 좀비 예능, 여전히 먹힐까 - 미디어오늘
- ‘협회에서 왔습니다’ 무리지어 군청 드나들며 광고비 요구한 기자들 - 미디어오늘
- 우르르 나가는 국힘 뒤로 “김건희 돈 봉투 500만원 설명 좀 해보라고” - 미디어오늘
- 美 ‘정부효율부’ 수장 일론 머스크…매일경제 “한국도 검토할 만” - 미디어오늘
- 세 번째 ‘김건희 특검법’ 국회 본회의 통과 - 미디어오늘
- 민주당, 주진우 고발 “이재명 ‘재판 생중계 반대’ 허위 사실 유포” - 미디어오늘
- [속보] 이진숙 방통위원장 감사요구안 국회 본회의 통과...전례 없어 - 미디어오늘
- 尹 기자회견 이후 조중동 “김건희 바라보는 尹 답답해” 한목소리 - 미디어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