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월의쉼표] 사라진 그리마

2024. 11. 14.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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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 있던 남편이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질렀다.

남편이 자신은 못하겠으니 나더러 그것을 처리해 달라고 했다.

남편이 그러면 죽이지는 말고 집 밖으로 내보내자고 했다.

그리고 남편과 내가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그리마는 사라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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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에 있던 남편이 갑자기 으악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인가 가보니 그가 벽 한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상추며 방울토마토며 대파 등을 심어놓은 화분들 사이 벽에 시커먼 무엇인가가 붙어 있었다. 그리마였다. 흔히 돈벌레라고 불리는, 지네처럼 다리가 많고 움직임이 빠른 그 절지동물 말이다. 남편이 자신은 못하겠으니 나더러 그것을 처리해 달라고 했다.

나라고 쉽겠는가. 세상에 벌레를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벌레 죽이는 것을 좋아서 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살아 있는 그리마도 징그럽고 무섭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죽인다는 것은 더 끔찍했다. 남편이 그러면 죽이지는 말고 집 밖으로 내보내자고 했다. 죽이든 내보내든 우리가 뭔가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내보낸다면 어떤 경로로 내보낼지, 실패할 경우 어떤 대안이 있을지 등 여러 가지를 궁리해야 했다. 그리고 남편과 내가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 그리마는 사라져버렸다. 남편은 녀석이 눈앞에 있을 때보다 더 경악했다. 당장 찾아야 한다며 펄펄 뛰는 그와 반대로 나는 마음이 평온해졌는데 동시에 이 평온함이 어딘가 낯설었다.

까마득한 이십 대 시절 친구와 둘이 남해 여행을 갔던 기억이 났다. 우리는 바닷가 민박집에 여장을 풀었다. 친구가 씻고 오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비명을 질렀다. 방바닥에 민달팽이 한 마리가 기어가고 있었다. 나는 내가 처리할 테니 어서 씻고 오라고 친구를 안심시켰다. 쓰고 있던 일기를 마저 쓰고 그것을 내보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기장을 덮었을 때 민달팽이는 사라져 있었다.

친구와 나는 방 구석구석이며 창틀, 장판 밑, 심지어 장롱 서랍까지 뒤졌다. 하지만 코딱지만 한 방 어디에도 녀석은 없었다. 어떻게 된 거지.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전전긍긍하며 사방을 살피고 또 살폈다. 이제 그만 찾자. 그렇게 말한 것은 친구였다. 안 보이니까 안 무서워. 친구의 얼굴은 정말로 평온해 보였다. 나는 아니었는데. 눈에 보이는 민달팽이는 하나도 안 무섭지만 눈에 안 보이는 민달팽이는 무섭고 불편했는데. 그래서 그 밤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그랬던 내가 이제는 사라진 그리마에 안도하고 있다. 이십여 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가 이렇게 멀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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