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권의 묵묵]이 땅에 살기 위하여

기자 2024. 11. 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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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이맘때 전국노동자대회가 열린다. 지난주 토요일에도 수만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시청 인근에서 열렸다. 그런데 작년부터 특별한 노동자들이 함께하고 있다. 노동자들이 노동자대회에 참석하는데 뭐가 특별할까 싶지만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이 노동자들은 사회가 노동자로서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의 노동자대회 참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주장이고 투쟁이다.

서울시가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에서 해고한 중증장애인 노동자들의 이야기다. 지금 이들은 수백일째 해고에 맞서 싸우면서 동시에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정받기 위해 싸우고 있다. 해고노동자라는 비극적 이름마저 이들에게는 획득 지위가 된 셈이다.

고용승계 없이 공공 사업 폐지한순간 일자리 잃은 중증장애인
일은 했지만 노동자가 아니다?죽지 않으려 얼마나 싸워야 하나

한 번에 외우기도 힘든 ‘권리중심 중증장애인 맞춤형 공공일자리’라는 긴 이름을 보고 있노라면 중증장애인들의 설움과 불안이 함께 느껴진다. 권리가 아닌 시혜와 동정에 기대 살아온 세월, 세상에 선물이 아닌 짐짝으로 태어났다는 비난을 받아온 세월에 대한 설움. 그런데 이 설움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될 수 있을까. 그래서 말이 길어진다. 우리의 일자리는 시혜가 아니라 권리이고, 우리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무엇보다 우리는 공공의 가치를 생산하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일자리 이름에 잔뜩 욱여넣었다. 그만큼 불안하기 때문이다.

현재 서울시의 행태를 보면 이 불안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에게 잠시 일자리를 내주었지만 이들을 노동자로 간주한 건 아니라는 징후가 뚜렷하다. 만약 서울시가 이들을 정식 노동자로 간주했다면 고용승계 대책도 없이 이렇게 간단히 사업을 폐지해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서울시 당국자의 머릿속에서 이 사업은 고용대책이 아니라 복지 서비스였던 것 같다. 기분이 내킬 때 호주머니 뒤져서 던져주는 동전 같은 것 말이다.

서울시만이 아니라 정부도 그렇다. 고용노동부가 운영해온 ‘중증장애인 동료지원가 사업’이라는 게 있었는데 올해 하마터면 없어질 뻔했다. 중증장애인들이 동료 중증장애인들을 찾아내 상담도 하고, 일자리도 알아봐주는 일인데 노동부가 예산을 책정하지 않는 식으로 폐지하려 한 것이다. 발달장애인들이 열심히 싸워서 국회를 움직이고 정부를 움직여 겨우 지켜냈다. 그런데 정부는 이 사업의 주관 부처를 노동부에서 보건복지부로 바꾸었다. 사업 명칭은 ‘동료지원가’에서 ‘동료상담가’로 단 두 글자 바뀌었는데 주관 부처가 달라지니 사업이 완전히 달라 보인다. 당신들은 일하는 게 아니라 복지 서비스를 받는 중이야, 그런 말을 하는 것 같다.

권리중심 공공일자리도 그렇고 동료지원가 사업도 그렇고, 중증장애인들이 하는 일들은 우리 사회를 인권 친화적으로 만들고, 문화적 다양성을 창출하며,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일원인 중증장애인들의 사회 참여를 돕는 활동이다. 그런데도 정부와 서울시가 이들이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 사회에 가치를 더하고 있다는 사실을 왜 이토록 부인하려 하는지 모르겠다. 이들을 가치생산자로 인정하면 안 되는 무슨 이유라도 있는 걸까. 중증장애인의 노동권을 부인하고 이들을 짐짝으로 취급하는 것이, 우리는 잘 모르지만, 혹시 체제 근간이 되는 어떤 원리를 지켜야 하기 때문인 걸까.

그런데 연구자가 호기심을 느낄 만한 대목에서 당사자는 죽음을 느낀다. 지난주 토요일 오후 충무로역 앞에서 전국노동자대회의 사전대회 형식으로 전국장애인노동자대회가 열렸다. 이곳은 2017년 겨울 중증장애인들이 공공일자리를 요구하며 농성을 벌였던 곳이다. 말하자면 이 나라에서 처음으로 중증장애인들의 노동권이 선포되고 그 일자리가 탄생한 곳이다.

이날 삭발투쟁을 결의한 탄진씨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해고노동자 김탄진입니다. 2009년 5월에 탈시설했습니다. 제가 일을 하는 이유는 죽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그는 한밤중에 팔과 무릎으로 기어서 시설을 탈출한 아내와의 대단한 러브스토리 주인공으로도 유명한 사람이다. 그는 ‘죽지 않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 말에는 일자리에 생계가 달렸다는 의미만 담긴 게 아니다. 노동권을 부인당하는 것은 가치생산자라는 사실을 부인당하는 것이다. 사회에 보탬이 아니라 짐이 되는 존재. 장애인시설도, 나치의 가스실도 이런 사고 위에 세워진 것이다. 중증장애인들이 시설에서 기어 나온 이유도, 매번 끌려 나오면서 지금 700일 넘게 지하철 승강장에 들어서는 이유도 단 하나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30년 전 한 시인이 적었듯이, “쉬어터진 몸부림에도/ 대답 하나 없는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이 땅에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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