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터의 창]“내 백성이? 아니, 왜?”
영화 <전,란>에서 차승원이 연기한 임금 선조는 나라나 백성보다 자신의 안위와 권력 유지에만 몰두하는 인물이다. 왜군이 쳐들어오자 도성을 버리고, 백성이 죽든 말든 나루터를 불태운다. 왕권이 위협받을까봐 의병장 김자령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민생이 도탄에 빠져 있는데 궁의 재건에만 집착한다. 어리석고 무능한 데다 음흉하기까지 하다.
영화 속 ‘분노 유발자’ 선조를 보며 오늘날을 떠올리게 된다. “다스리는 자들의 고달픈 숙명”을 말하는 선조에게서 힘든 상황들이 ‘업보’라는 권력자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그이는 “돌을 던져도 맞고 가겠다”고도 했다. 백성들이 궁에 불을 질렀다는 소식을 들은 선조가 “내 백성이? 아니, 왜?”라고 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성난 민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권력자가 어디 선조뿐이겠나.
이런 생각을 필자만 하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한 친한동훈계 인사는 “선조가 도망갔을 때 분조를 만들어 지켰던 광해군처럼 대응해야 한다”고 했다. ‘분조’(分朝)는 임금을 대신해 나라를 다스리는 작은 조정이었다. 망명까지 고려했던 선조는 신하들 간청에 광해군을 세자로 세워 분조를 이끌게 했다. 여권 인사조차 대통령에 대한 기대를 접고 ‘플랜B’를 얘기하는 지경인 셈이다. 경향신문이 정치학자 30명에게 윤석열 대통령 임기 절반에 대한 평가를 묻자 “그냥 빨리 다른 분한테 맡기는 게 정답”이라는 제언이 나오기도 했다.
실제 지난 7일 윤 대통령의 기자회견과 그 이후 상황을 보면 더 이상 기대하기 어렵다. 윤 대통령은 “국민께 걱정과 염려를 드렸다”며 고개를 숙였지만,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육영수 여사도 청와대 야당 역할을 했다며 ‘순진한’ 김건희 여사의 국정개입을 정당화했다. 명태균씨가 김 여사로부터 돈봉투를 받았고, 김 여사의 봉하마을 방문 시 대통령 특별열차에 탔다는 의혹도 다 김 여사가 순진해서 나온 건가.
게다가 윤 대통령은 10월12일, 11월2일·9일 군 소유의 태릉체력단련장(태릉CC)에서 골프를 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의 도발 위협이 있던 시기, 윤 대통령과 명씨의 통화 육성 공개로 지지율이 바닥을 치던 시기에 골프를 즐기는 무개념이 참담하다. 11월6일 당선이 확정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과의 ‘골프 외교’ 준비용이라는 대통령실 해명도 어불성설이다. 윤 대통령이 대선 경선 이후 명씨와 접촉한 적 없다는 거짓 해명에 이어 언제까지 꼼수만 부릴 건가. 결국 윤 대통령이 고개 숙인 건 일단 소나기는 피하자는 ‘신문 1면용’ 사과일 가능성이 크다.
여당이 윤 대통령의 변화를 이끌어낼지도 회의적이다. “민심의 파도”를 말하던 한동훈 대표는 대통령 기자회견 후 안면을 싹 바꿨다. 시인 김수영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하는 자신을 반성했다. 한 대표의 ‘강강약약’(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하다)은 어디 갔나.
윤 대통령은 스스로 퇴로를 끊고 있다. 국민 3분의 2가 찬성하는 김 여사 특검법을 받아들여 연착륙할 기회를 차버렸다. 오마이뉴스가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에 의뢰해 11월1~2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윤 대통령의 중도하차를 찬성한다는 응답은 58.3%였다. 윤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대학교수들의 시국선언이 잇따르는 등 민심의 분노는 커지고 있다. 임기단축 개헌이든, 조기하야든 더 이상 그의 통치를 원치 않는 국민들이 적지 않은 것이다. 이 모두가 윤 대통령이 자초한 업보다.
하버드대 교수 제임스 러셀 로웰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을 평가하면서 “국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결국 국민을 억압하게 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론에 대한 깊은 이해는 가장 큰 정치적 능력”이라고 했다(도리스 컨스 굿윈, <권력의 조건(Team of Rivals)>). 윤 대통령에게 그런 능력이 보이기는커녕 “내 백성이? 아니, 왜?”라고 묻는 선조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전,란> 말미에 탈춤놀이의 사자가 임금 인형을 덥석 무는 장면이 나온다. 민심을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권력자에겐 결국 민심이 대응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분별력을 잃은 권력자의 위기가 국가의 위기로 번지지 않아야 한다. 마크 밀리 미국 합참의장은 2020년 11월 대선 패배로 감정적으로 무너진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전쟁을 벌일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정부 관료들 및 중국 측과 협의했다. 지금 정치권이 할 일은 분조에 버금가는 비상조치를 마련하는 것일지 모른다.
김진우 정치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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