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찔레꽃’ 슬로모션, 박자 박찬 깨달음서 탄생했다 [진옥섭 풍류로드]
떠돌던 시절, 김대환이 장사익을 부르더니 ‘송아지’를 불러보라 했다. 불렀더니 박자를 맞추지 말고 부르라 했다. 그렇게 불러봤더니 속으로 세고 있는 박자도 버리라 했다. ‘노래를 이렇게 부를 수도 있구나’ 순간 ‘해탈’을 했다. 이 박자를 박찬 깨달음이 ‘찔레꽃’ 탄생 배경이 된다.
옛 분들은 소리나 춤을 직접 평하지 않았다. 소리가 좋았으면 넓적다리가 부어서 걷지 못했다고 전한다. 소리가 좋아 허벅지를 퉁퉁 붓게 치면서 추임새를 했다는 말이다. 예기(藝妓)들은 “소리나 춤이 그냥 나오나, 활도 당기고 서화도 한 폭 쳐야 나오지” 했다. 그래서 소리나 춤의 평도 활이나 서화로 말했다고 한다. 지난 10월23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의 장사익 소리판 ‘꽃을 준다 나에게’, 옛 분들처럼 공연 바깥의 풍류담으로 에둘러야겠다.
2009년 장사익은 과녁을 저 멀리 42.195㎞에 세워 두고 제 몸을 쏘았다. 환갑의 나이에 심장이 터지는 생지옥을 달려 4시간12분34초에 마라톤을 완주한 거다. 바람을 돌파할 유선형의 날을 세우느라 제 몸을 깎았을 터이다. 김녕만(사진가)의 사진을 보니 주름과 뒤섞인 굵은 힘줄이 선명했다.
2019년 5월 장사익의 글씨전 ‘낙락장서(落樂張書)’를 올렸다. 일필휘지는 한마디로 팬심에 대한 붓 심이었다. 눈이 온다, 그래서 어쩐다, 갈 봄 여름 없이 편지를 썼다. 그렇게 수만 통의 편지로 씨알이 굵어진 글씨였다. 언제라도 빈터를 만나면 필묵을 꺼내 들었다. 포장지, 종이 가방, 택배 박스 등 먹만 묻는다면 어디에든 눌러 썼다. 그렇게 치열히 가다듬어 그의 노래처럼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장사익류를 완성했다.
혼자 보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장금도(1928~2019). 조갑녀(1923~2015) 명무와 함께라면 “아따! 춤을 한 폭 쳤네” 했을 터였다. 그리고 태평소를 불라 하고 팔을 벌렸을 참이다. 그분들의 공연을 올리면서 장사익의 글씨로 포스터를 만들었다. 그는 명무들의 춤을 형용하면서 상형문자 같은 글씨를 고안해 냈다. 춤을 그리는 그의 모습이 점차 괴이해졌다. 마침내는 좀비처럼 온몸을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다. 고백하건 바, 혼자 보기에는 무서운 장면이었다.
조갑녀 명무가 포스터 글씨를 보더니 “장씨가 활도 좀 쏘나?” 했다. 글씨가 이 정도면 필시 활도 좀 쏠 거라는 생각이었다. “제 몸을 쏘는 사람”이라 답했다. 2012년 12월 조갑녀는 장사익의 소리판에 휠체어를 타고 나왔다. 그간 신세를 갚는다며 90살의 노구로 마지막 춤을 추었다. 2014년 3월 장사익은 임종을 앞둔 조갑녀의 병상에 갔다. 제가 노래 불러 드릴게요. 명무의 손을 잡고 나직하게 ‘봄날은 간다’를 불렀다. 생애의 마지막 날이 되었고, 다음 날 4월1일 향년 92로 타계했다.
2022년 3월 사진전 ‘장사익의 눈’에서 인화되어 내걸린 그의 눈길을 마주했다. 코로나로 모두 멈춘 때 떠돌며 휴대전화로 벽을 찍었다. 누구라도 힐끗 지나치는 하찮은 광경을 프레이밍했다. 그리고 사진인지 그림인지 모르게 내걸었다. 윤세영(사진평론가)은 판소리의 명장면처럼 ‘눈[目]대목’이라 했고, 일본의 치바 시게오(미술평론가)는 ‘눈의 면벽(面壁)’이라 평했다.
아! 옆 차가 먼저 출발할 때, 내 차의 급속 후진 같은 착시에 화들짝 놀랐다. 벽이라면 나도 일가견이 있었다. 풀로 붙이면 ‘풀팅’, 스카치테이프로 붙이면 ‘스카팅’, 빈 벽을 찾아 포스터를 붙였다. 단속하는 순경의 눈길을 피해 시멘트벽에 밀착할 때, 벽에서 부스러져 떨어지는 모래알을 쥐면서, 그 모래에 몸을 숨겼을 모래무지의 생태도 걱정하던 나였다. 그런데 장사익은 벽 앞에서, 벗겨지는 페인트칠의 미늘을 확대했고, 등나무 넝쿨의 그림자를 들여다봤고, ‘아무도 생각지 못한 추상의 세계’를 골라냈다.
문득 그의 한마디가 생각났다. “아무리 찾아도 없어.” 전남 순천에서 야외공연 끝나고 화장실을 못 찾아 결국 갈대밭에 들어갔다. 너나없이 서서 일을 보는데, 옆 노인이 힐끗 보더니 “어!” 했다. ‘당신, 아까 노래하던 그 장씨 맞지’를 줄인 ‘어!’에 대답 대신 어색하게 웃었다. 그 노인이 마치 범인 잡은 순경처럼 “어때, 내 눈 맵지” 하더란다. 옹색한 곳에서 ‘밝지’보다 더한 ‘맵지’를 뱉은 노인과 옹골찬 한마디를 포착한 장사익. 전시장에서 80㎝×100㎝ 사이즈로 진열된 장사익의 눈이 ‘내 눈 맵지’하고 있었다.
2024년 3월1일 흑우 김대환(1933~2004) 추모제를 지냈다. 고인은 박자를 넘어선 프리재즈의 완성자로 장사익의 음악적 스승이다. 떠돌던 시절, 김대환이 장사익을 부르더니 ‘송아지’를 불러보라 했다. 불렀더니 박자를 맞추지 말고 부르라 했다. 그렇게 불러봤더니 속으로 세고 있는 박자도 버리라 했다. ‘노래를 이렇게 부를 수도 있구나’ 순간 ‘해탈’을 했다. 무슨 무협지 같은 이야기인가 싶지만, 이 박자를 박찬 깨달음이 ‘찔레꽃’ 탄생 배경이 된다.
“하…얀 꽃 찔레꽃” 첫 소절의 느림, 영화 촬영 시 빨리 돌리고 상영 시 정상으로 돌려 얻는 규칙적인 슬로모션이 아니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걸작 ‘열혈남아’에서 류더화(유덕화)가 칼을 들고 주막에 뛰어들 때, 편집 중에 늘어난 필름으로 만든 우둘투둘한 슬로모션이다. 이 아슬아슬한 속도감으로 노래의 급소를 파고들어 관객의 탄성을 터트리는 장사익류가 시작된다. 엠알과 립싱크로 물든 판에 서슬푸른 라이브로 쥐락펴락하는 사내, 중원에 나타난 무명 칼잡이가 쾌도난마로 풍운을 열었다.
2024년 10월14일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동백아가씨 발표 60주년 전시회’가 열렸다. 1964년 중학교 3학년인 장사익을 사로잡은 노래였다. 장사익이 30년 전 데뷔하면서 30년 불렀노라 말한 노래였다. 개막식에 영원한 국민가수 이미자가 자리했고, 장사익은 그 앞에서 ‘동백 아가씨’와 ‘울어라 열풍아’를 불렀다. 나는 전남 담양군문화재단에 급한 일이 생겨, 가야 할 판에 가지 못했다. 1996년 강헌(음악평론가)이 만든 검열철폐 기념 콘서트 ‘자유’에 못 갈 때처럼, 기둥에 이마를 박으며 아쉬워했다.
저녁에 전화했더니 작곡가 백영호(1920~2003)의 장남 백경권(서울내과 원장)의 피아노에 맞추어 “얌전히” 불렀다고 했다. 원곡을 부른 가수에 대한 예의로 자신만의 창법을 제한한 것이다. 이미자의 반응을 물었더니 “어쩜 그렇게 노래를 잘하냐”했다며 초등학생처럼 좋아했다. ‘놓친 가오리 멍석만 하다’는 말을 되새기며 또다시 운전대에 이마를 쿵쿵 박았다.
2014년 10월23일 데뷔 30주년 기념공연, 엉뚱한 가정을 해보았다. 만약 1970년 취입한 ‘대답이 없네’가 히트했다면 올해 데뷔 54주년이다. 그렇다면 목청 좋았던 흘러간 가수 장나신(녹음 당시 장사익 예명)은 있고, 오늘 가객으로 불리는 장사익은 없다는 가정이다. 생각해보라, 누가 인기를 누릴 때 피리와 대금을 학습하겠는가. 누가 난장을 떠돌면서 태평소를 불겠는가. 누가 떠돌면서 음(音)을 움 틔운단 말인가. 젊어서는 속성이 아닌 숙성, 나이 들어 썩힘이 아닌 삭힘이 된 소리를 누가 낸단 말인가.
이쯤 되니 또 상상이 복받쳤다. 1970년 ‘대답이 없네’가 히트해 지금 54년 차 원로가수로 장나신이 있다. 그런데 국악의 대중성과 대중가요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내가 장사익을 상상 속에서 만났다. 상상이 현실이 되려면 영화 터미네이터처럼 1970년으로 돌아가 ‘대답이 없네’의 히트를 막아야 한다. 나는 한국가요 100년에 이 가수는 존재해야 한다고, 터미네이터를 보내자고 신파조로 읍소한다. 그런데 어디에서도 “대답이 없는, 것이었던, 것이었다.”
장사익 10집 음반 ‘사람이 사람을 만나’에 54년 만에 재녹음한 ‘대답이 없네’가 실렸다. 박성서(가요연구가)가 발굴한 1970년 녹음과 비교해 보았다. 2024년 녹음에서 장사익은 장사익류를 넣지 않고 얌전히 불렀다. 마치 이미자 앞에서 보인 원곡의 가수에 대한 예의 같았다. 단 한 곡만을 남긴 장나신, 그 시절의 젊은 그에게 바치는 예의인가 싶었다.
진옥섭 | 담양군문화재단 대표이사. 초등학교 4학년 때 이소룡의 ‘당산대형’을 보고 ‘무(武)’를 알았고, 탈춤과 명무전을 통해 ‘무(舞)’에 빠져들었다. 서울놀이마당 연출로 서울굿을 발굴하면서 ‘무(巫)’에 심취했고, 초야를 돌며 기생, 무당, 광대, 한량 등 숨은 명인을 찾았다. ‘남무, 춤추는 처용아비들’, ‘여무, 허공에 그린 세월’, ‘전무후무(全舞珝舞)’를 올리며 마침내 ‘무(無)’를 깨닫게 되었다. 이 사무친 이야기를 담은 ‘노름마치’를 출간했고, 무대와 마당을 오가며 판을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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