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하는 일, 슬픔에 귀를 여는 것 [김명인 칼럼]

한겨레 2024. 11. 14.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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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구절이야말로 트라우마 기록으로서의 작품의 핵심을 응축한 구절이다. … 한강의 소설들은 아직도 더 많은 애도가 필요한 이 세상을 위한 기도서로서 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강만의 세계가 아니라 식민지와 분단과 군사독재와 양극화 속에서 두터운 고통의 자양을 얻어온 한국 문학이 가진 기본값이며 동시에 비슷한 크고 작은 비극들에서 탄생한 세계 문학의 기본값이기도 하다.

김명인 | 문학평론가·인하대 명예교수

한강의 노벨상 수상과 관련한 많은 후일담들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단연 흥미로운 것은 애국심과 혐오감정 사이에서 혼란에 빠진 극우파들의 반응이었다. 일부 우익단체 구성원들은 “제주 4·3폭동 미화와 광주사태 미화 작가에게 상을 주는 게 말이 되냐”고 주장하며 스웨덴대사관 앞까지 찾아가 시위를 벌였고 각종 소셜미디어에서도 축하는 하지만 작가의 5·18과 4·3에 대한 인식은 문제라는 식의 논평들이 적지 않았다. 어떤 소설가는 “오십팔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들의 무장반란을 우리 젊은 군인들이 목숨 바쳐 진압, 국가와 국민을 지킨 사건”이며 “제주사삼 역시 대한민국의 탄생을 막으려고 남로당 잔당세력이 일으킨 무장반란이고 우리 경찰이 진압한 사건”이며 “두 사건 모두, 진압에 성공하지 못했다면,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도 없었다”고 하며 한강의 작품들이 5·18과 4·3의 진실을 왜곡한 것이기 때문에 이번 노벨상 수상이 유감스럽다는 글을 써서 화제를 일으켰다.

여기서 새삼스럽게 5·18과 4·3의 진실에 대해 논변할 생각은 없다.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함께 광주의 5·18민주화운동기록관이나 제주의 4·3평화공원 같은 곳을 관람하면서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지만, 그런 소통의 기회가 없다면 확증편향의 시대에 서로 다른 미디어를 통해 무너진 바벨탑 아래 선 사람들처럼 각기 다른 말만 할 테니 그것도 피곤한 일이다. 다만 한강의 두 작품이 과연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광주사태’와 ‘제주 4·3폭동’을 미화한 작품인가, 그리고 ‘자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작품인가에 대해서는 이야기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나는 작가 한강과 개인적 친분도 없어서 그의 현대사 인식과 이른바 ‘국가관’이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다만 나는 그의 작품들을 읽었을 뿐이고, 그 작품들을 읽는 데에 작가의 현대사 인식이나 국가관 여하는 전혀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다.

‘소년이 온다’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의 한강의 글쓰기는 ‘애도’의 글쓰기다.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인간을 넘어 뭇 생명들 모두의 본성에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죽음이 천수를 다한 것이라 해도 애도의 발생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만일 그것이 어떤 불의의 폭력에 의해 발생한 생명의 갑작스러운 단절이라면 그에 따르는 애도는 더욱 간절하고 애통한 것이 된다. 애도에는 여러가지 정동이 뒤섞여 있다. 슬픔이 있고 죽음을 불러온 폭력에 대한 분노가 있고, 그 죽음을 막을 수 없었던 데에 대한 자책과 죄책감들이 그것이다. 그것이 외적으로 발산되면 폭력에 대한 진상 규명과 정의 실현에 대한 희구와 행동이 뒤따를 것이고, 그것이 내적으로 집중되면 개인적 트라우마로 축적될 것이다. 한강의 두 작품은 후자, 즉 애도가 트라우마로 응축된 경우이며, 그것을 외적으로 발산시키는 쪽에 더 무게를 둔 5·18이나 4·3 관련한 다른 문학작품들과 각별히 구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소년이 온다’에 나오는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는 구절이야말로 트라우마의 기록으로서의 이 두 작품의 핵심을 응축한 구절이다.

나도 이 구절을 읽으면서 눈물을 쏟았던 기억이 새롭다. ‘소년이 온다’가 나올 무렵은 세월호 참사의 충격이 온 나라를 휩쓸 때이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장례식을 치르건 아니하건 남은 사람들의 삶을 오래도록 장례식으로 만든다. 굳이 5·18과 4·3만이 아니다. 삼풍백화점 붕괴 참사,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 용산 철거민 참사,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 수많은 크고 작은 참사들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장례식 같은 삶의 고통을 한강은 이 두 작품을 통해서 보여준 것이며, 한강의 소설들은 아직도 더 많은 애도가 필요한 이 세상을 위한 기도서로서 제출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강만의 세계가 아니라 식민지와 분단과 군사독재와 양극화 속에서 두터운 고통의 자양을 얻어온 한국 문학이 가진 기본값이며 동시에 비슷한 크고 작은 비극들에서 탄생한 세계 문학의 기본값이기도 하다. 문학은 대체로 행복과 안정의 산물이 아니라 불행과 불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한강과 노벨상과 5·18과 4·3에 두루 시비를 건 김아무개 작가는 또 현재의 한국 문학이 “분노와 불안으로 장악”되었으며 이는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포용,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상실한 것이라고도 말했다. 세상에는 여러가지 문학이 있다. ‘문학은 이런 것’이라거나 이래야 한다는 말은 이제 시효를 잃었다. 나는 쾌감과 행복, 위로와 위안, 안정과 조화를 추구하는 문학도 얼마든지 존재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역사 사회적 문제의식이나 분노와 불안에 대한 자극(?) 없는 수많은 장르문학과 웹소설들도 넘치듯 독자층을 사로잡고 있다. 다만 그 문학들 중에 ‘분노와 불안’뿐만이 아니라 여전히 슬픔과 고통이라는 문제를 놓지 못하고 있는 문학들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노벨문학상뿐만 아니라, 국내외의 수많은 문학상들은 그 많은 문학들 중에서 김아무개 작가 말대로 하필 이런 “부정적 감성”들로 가득하며 “사회 불평불만 세력”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문학들을 주목하고 그들에게 상까지 주는 것일까. 예술가들의 조상은 사람들의 슬픔과 고통을 치유해주는 주술사나 영매들이다. ‘부정적 감성’들을 다룬 문학들이 여전히 번성(?)하는 이유는 독자들이, 세상 사람들이 그만큼 제가끔의 슬픔과 고통과 불안과 분노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하고 최소한 누군가가 자기를 대신해서 그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타인과 세상에 대한 포용이나 사회적 규범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일은 기득권층과 독재자들이나 하는 말이다. 그 지겨운 말들을 왜 문학을 통해 다시 들어야 하는가. 만 사람이 즐겁다고 해도 단 한 사람이 슬퍼한다면 누군가는 그의 슬픔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것이 원래 문학이, 작가가 하는 일 중에 가장 중요한 일이다. 한강은 그런 여러 작가 중에 한명일 뿐, 지금이라도 서점에 가서 우리 소설 한권을 들고 읽어보기 바란다. 거기서 당신은 또 다른 목소리의 한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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