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 투쟁과 통일, 사회 민주화 위해 모든 것 바치셨죠
[기억합니다] ‘사법살인 63년’ 최백근 선생 추모글
일제 때 동맹휴학 이끌다 옥고 해방 뒤 좌우합작 여운형 노선 따라
분단 막으려 노력하다 3년 옥살이
5·16 쿠데타 뒤 사법살인 당해
대법원 재판 생략하고 서둘러 집행
혈족 없어 진실규명 신청 어려워
국가가 나서 직접 진상 규명을
가을바람에 떨어지는 낙엽은 자신의 몫을 다했기에 계절의 변화를 원망하지 않는다. 이처럼 인간의 삶도 자연의 이치처럼 주어진 삶을 채울 생명의 권리가 있기에 권력을 무력으로 강탈한 정권에 의해 희생당하지 않을 법적 권리가 있다. 그렇다면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살해당한 희생자가 있다면 국가는 이유를 막론하고 희생자들의 억울한 죽임에 대한 진상규명을 통해 책임질 것은 책임져야 한다. 아울러 그러한 희생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안전한 법적보호 장치와 함께 희생자들에 대한 책임을 잊지 않으려는 기억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올해는 5·16군사쿠데타로 권력을 찬탈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해 살해당한 수암 최백근 선생 탄생 110주년이자 사법살인 63년이 되는 해이다. 수암은 1914년 2월20일 전남 광양에서 태어나 일제 강점기인 1931년 보통학교 6학년 때 학생 신분으로 수업료 철폐와 광주학생운동을 지지하는 동맹휴학을 이끌었다. 당시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아 한쪽 귀가 파열되었고 진주소년원에서 6개월 옥고를 치렀다.
수암은 광주고보를 나와 일본 와세다대에 진학했으나 비밀독서회 사건으로 학업을 마치지 못하고 귀국했다. 이후 해방 정국에서 분단을 막으려 좌우합작의 길을 간 여운형 선생 뜻에 동참해 ‘건국준비위원회’와 ‘근로인민당’에서 중앙위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여운형 선생 사망 후에도 통일을 위해 노력하다 1952년 구속되어 3년 가까이 옥고를 치렀다. 1955년 출소한 수암은 서울 신촌에 있는 양장점에 근무하고 있던 필자의 어머니(고 주명순·1923~98)와 인연이 되어 평생동지로 언약하였다. 수암은 4·19혁명이 발발하자 혁신계 인사들이 주축이 된 사회당 창당준비위원회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면서도 ‘통일민주청년동맹’을 지도하는 등 통일운동에 헌신하였다. 이 시기 수암은 어머니의 경제활동으로 군사정권에 맞서는 민중정당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권력을 찬탈한 5·16 쿠데타 세력은 불과 두 달 만에 3천명이 넘는 양심적인 인사들을 체포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이 다수 포함된 쿠데타 세력에 의해 항일애국과 통일운동을 전개한 수암과 어머니는 동시에 불법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구속되었다. 헌법질서를 파괴하고 총칼로 권력을 잡은 군사정권에 의해 체포당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면 사회 민주화와 분단된 나라를 다시 하나로 이으려는 조국통일의 염원뿐이었다. 그런데도 군사정권은 특수범죄처벌법이라는 위헌적인 소급입법 즉 3년6개월 전 사건까지 처벌할 수 있는 법을 만들고, 군인도 아닌 일반인을 군사법정에 세워 1961년 12월21일 수암을 사형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대법원 재판 절차도 생략하고 서둘러 살해한 의도는 민주화와 통일을 열망하는 민주진영을 압살하기 위한 살인광란에 불과했다.
영원할 수 없는 권력에 종지부를 찍은 정권교체는 국가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희생당한 이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 출범으로 이어졌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희생자들이 친·인척들 진정에 의해 진상규명 결정이 내려져 국가로부터 배상받았지만 수암은 진화위에 진정조차 할 수 없었다. 희생자의 배우자, 8촌 이내의 혈족, 4촌 이내의 인척만 진정을 할 수 있는데, 수암은 이에 해당하는 친·인척이 없어서다.
국가권력에 의해 죽임당한 희생자들이 진정할 수 있는 조건에 해당하지 않을 경우 국가가 직권으로 이를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살인통치로 희생당한 이들을 국가가 나서 진상규명을 해 진실을 밝혔을 때 희생자에 대한 애도는 시작될 수 있으며 억울한 죽임들을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국방부나 검찰청의 수장고 또는 국가기록원에는 수암 선생에 대한 여러 기록이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은 망각할 순 있어도 역사는 기록으로 생생하게 남는다.
수암은 개인의 안락을 위해 기회주의자의 길을 걸을 수 있었고 얼마든지 출세 대로를 달릴 수 있었지만 국가와 민족이 처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세월이 흘렀다고 역사를 망각한다면 수암이 당한 피를 토하는 고통은 언제든 반복될 수 있다.
반제반봉건 동학혁명에서부터 항일애국투쟁과 오월 항쟁과 수많은 자주민주통일투쟁의 역사를 간직한 우리 사회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선생 묘소 앞에서 비통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다. 어머니는 1998년 6월 임종하시기 전까지 망우리 수암 묘지(2018년 마석 모란공원 묘지로 이장)를 돌보셨다. 어머니는 저에게 수암의 묘소 관리를 소홀하지 말 것을 당부하셨다.
일제강점기에는 항일투쟁을, 분단국가에서는 통일과 사회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친 수암 선생! 진상규명은 물론이요 선생을 비롯해 권력에 의해 부당하게 죽임을 당한 수많은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물을 시민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운다면 다시는 국가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죽임들이 반복되지 않으리라.
박윤경/성균관대 대학원 예술대 박사과정
Copyright © 한겨레신문사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 ‘공천개입 의혹’ 명태균·김영선 구속…법원 “증거인멸 우려”
- 명태균, 검찰에 “김건희 돈 두번 받았다”…대선후보 경선기간 포함
- 26년 발버둥, 입사 8개월 만의 죽음…“내 아들 억울함 풀어달라”
- 이준석 “윤, 지방선거 때도 공천 언급”…김태우 구청장 추천한 듯
- 윤, 8월부터 골프 치고 ‘트럼프 때문’?…용산 “운동한 게 문제냐”
- 김혜경 ‘법카 유용’ 유죄에…이재명 본격 겨누는 검찰
- 아기 하마 ‘무뎅’ 치명적 귀여움…매일 1만명이 보러 온뎅
- ”윤 정권, 실낱같은 희망도 사라졌다” 고려·국민대 교수도 시국선언
- 16m 고래 ‘사체’ 악취 풍기며 4천km 이동…보라, 인간이 한 일을
- ‘킬러’ 없었던 수능…최상위권 눈치 경쟁은 치열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