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슈너트 빠진 감자수프, 오히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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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비건 레시피를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고 있지만 쿠킹클래스 제안이 들어오면 정중히 거절했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니까.
아니, 택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동물성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감자수프'를 끓이는 모습을 시연하기로 했는데 재료와 레시피를 받아본 주최 쪽에서 조금 난색을 표하며 재료 중 하나인 캐슈너트가 수입품이라 사용하기 곤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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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년째 비건 레시피를 소개하는 영상을 만들고 있지만 쿠킹클래스 제안이 들어오면 정중히 거절했다. 아니, 했었다. 나는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들어오는 일이 채식 요리 클래스밖에 없는 시기라면
어떨까? 선택해야 한다. 대출 상환을 제때 못하는 신용불량자가 될지, 실력은 없지만 운 좋은 강연자가 될지를. 올해는 꽤 자주 후자를 택했다. 아니, 택했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는다. 제안을 받들었다. ‘보릿고개를 넘는 프리랜서에게 강연 자리를 내어주시다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2024년 10월 마지막 주에도 ‘럭키비키’’(긍정적 사고나 운 좋은
상황을 뜻하는 말) 강연자가 될 기회가 생겨 서울 가는 비행기에 탔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요리’클래스가 아니라 ‘기후위기’에 대한 강의에 부수적으로 채식요리를 대접하는 자리였다는 것이다. 동물성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감자수프’를 끓이는 모습을 시연하기로 했는데 재료와 레시피를 받아본 주최 쪽에서 조금 난색을 표하며 재료 중 하나인 캐슈너트가 수입품이라 사용하기 곤란다고 했다. 아, 그렇구나. 기후위기 강연을 하러 가려고 비행기를 탈 때마다 장거리 이동을 위해 비싼 탄소를 뿜어내는 스스로의 모순을 발견하지만, 냄비 속 식재료가 타는 비행기(실제로는 배겠지만)의 모순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캐슈너트 대신 호두로 대체하면 어떨까요?”
주최 쪽의 제안에 잠시 고민에 빠졌다. 호두라…, 호두의 쌉싸름한 맛이 감자와 어울릴지 의문이 들었다.
“그냥 캐슈너트 빼는 걸로 가죠. 안 넣어도 맛있을 거예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답했다. 캐슈너
트 없이도 감자수프는 맛있을 것이다.
‘없어도 맛있다.’ 비건 지향을 시작하며 알게 된 비법이다. 특히 국물요리를 만들 때 편견이 크게 깨졌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 멸치나 참치액 등을 꼭 넣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직접 만들어 먹어보니 채소만으로도 깔끔하고 시원한 국물이 끓여졌다. 맛있기 위해 ‘반드시’ 동물성 식재료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3천 끼가 넘는 집밥을 식물성으로 만들며 매번 확인하는 진실이다.
강연 장소는 노란 조명이 따뜻한 ‘노노샵’이다. 비건, 제
로웨이스트 제품을 판매하는 멋진 가게다. “오늘은 강연이라기보다 감자수프를 먹으러 왔더니 같이 수다도 떨었다는 느낌이면 더 좋겠어요.”
긴장을 푸는
말로 입을 열었다. 채식하지 않는 분이 많이 신청했기 때문에 수프는 맛있어야만 한다. 10명 넘는 사람들 앞에서 감자와 양파를 자르고 두유와 함께 냄비에 넣고 끓였다. 블렌더로 재료를 곱게 갈아 소금으로 간을 맞춘다. 버섯과 양파 등으로 만든 채소 조미료도 넣었다. 보글보글 크림색으로 끓는 감
자수프를 작은 그릇에 담아 동물성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곁들여 모든 분에게 나눠줬다. 한 번 더 감자수프를 받으러 오는 분이 하나둘 늘어난다.
뿌듯한 마음을 가득 안고 돌아가는데 도로 양쪽으로 반짝이는 빨간 고깔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여긴 이태원이고 오늘은 핼러윈이었다. 찾아와주신 분들께 언제나처럼 감사 인사를 했지만 당연한 건 없었다. 아득하게 찌릿했다.
초식마녀 비건 유튜버
*비건 유튜버 초식마녀가 ‘남을 살리는 밥상으로 나를 살리는 이야기’를 그림과 함께 4주마다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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