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인의 성지 경주 낭산에 숨긴 ‘비밀’…재발굴하면 뭐가 나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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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능지탑은 사실 전면 재발굴해야 한다고 봐요. 아까 토론 참가자들끼리도 이야기했는데."
신라인의 성지였던 경주 낭산의 문화유산을 고찰하는 '신라 낭산의 시간, 미래로 잇다' 학술대회 자리였다.
낭산 서편 능지탑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문무왕(626~681)의 화장터로 알려진 곳이다.
낭산 유적의 역사적 가치를 고고문헌, 미술사, 보존과학, 사진 등 종합적 맥락에서 처음 검토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흥미진진한 담론들이 새롭게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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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능지탑은 사실 전면 재발굴해야 한다고 봐요. 아까 토론 참가자들끼리도 이야기했는데….”
지난 13일 오후 경주 보문단지 코모도호텔 1층 회의실에서 강봉원 문화재위원장이 힘주어 말했다. 신라인의 성지였던 경주 낭산의 문화유산을 고찰하는 ‘신라 낭산의 시간, 미래로 잇다’ 학술대회 자리였다. 토론좌장을 맡은 그가 운을 띄우자 분위기가 뜨거워졌다. 낭산 서편 능지탑은 삼국통일의 주역인 신라 문무왕(626~681)의 화장터로 알려진 곳이다. 1960~70년대 발굴조사 뒤에도 화장터 설은 통설로 남았으나, 탑 몸체 사면에 불상을 봉안한 너비 약 4m의 감실이 발견됐다는 점 때문에 학계에선 금당 설과 불탑 설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더욱이 감실에서 진흙으로 생동감 있게 부처의 몸을 빚은 불상인 소조불 조각들이 발견되면서 의문은 꺼지지 않고 있다.
경주 토박이 출신 연구자 박방룡 전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장이 가세했다. “일제강점기 때 경주 왕경의 출입구에 가까운 낭산 기슭 능지라는 마을에 있어 능지탑이라 했어요. 1960년대 황수영 박사가 이끄는 삼산오악 학술조사단이 일부 발굴갱(트렌치)을 파봤는데, 거기서 탄재가 나오고 불탄 흔적 있어서 신라 문무왕을 장사 지낸 화장지로 비정한 겁니다. 지금도 그렇게 확정돼 있는데, 그게 맞는지 아닌지 정확히 이야기하고 넘어갈 단계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게 화장지라면, 문무왕 화장지라고 하면 되지 왜 능지탑이라고 부릅니까?”
그는 화장지 아닌 가능성 중 하나가 복원된 석재들이라고 짚었다. 일부 석재들이 연화문 연화탑 같은 형태로 남아있는데, 고려시대 탑 양식이어서 통일신라 양식으로 보는 이들이 없다. 사면의 십이지상도 최근 인근의 전 황복사 터 발굴 조사 결과 거기 있던 것들이 탑에 옮겨간 것으로 확인된 바 있다. 그는 “능지탑을 과연 문무왕 화장터로 볼 수 있는지 없는지, 탑 기단 사방의 십이지상이 전 황복사 터 동편의 태왕릉지에서 가져간 것인지 그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기조 강연을 한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도 “화장터라는 기존 설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했고, 김유식 신라유산문화연구원장도 “시굴 조사를 통해 기본적 실체를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참석자 대부분이 재발굴과 명칭의 재론에 대해 공감을 표했다.
낭산 유적의 역사적 가치를 고고문헌, 미술사, 보존과학, 사진 등 종합적 맥락에서 처음 검토한 이날 학술대회에서는 흥미진진한 담론들이 새롭게 제기됐다. ‘신라 낭산과 밀교’에 대해 기조 강연을 맡은 주보돈 교수는 낭산 남쪽에 들어선 사천왕사와 왕경의 봉성사, 감포의 감은사 등이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의 7세기 통일전쟁 시기 불교의 밀교신앙 아래 밀접하게 연관된 절들이었고, 낭산은 그 밀교 호국신앙의 근거적 공간이 됐다는 설을 꺼냈다. 특히 기존 전 황복사 터라고 전해지는 낭산 북편의 절 터를 신라 신문왕 치세기에 세운 가람인 봉성사로 비정하는 새 견해를 제시했다.
불교미술사학자인 임영애 동국대 교수는 불상 양식 측면에서 전 황복사 터의 아미타불 좌상, 중생사 터의 관음보살입상, 십일면 관음보살상, 사천왕사 터 목탑 터 기단부의 녹유신장상 3구의 양식이 중국 영향을 받아 오직 7세기에만 등장했던 당대의 파격적 불교미술 양식으로, 이후 경덕왕 대에 동편 토함산에 왜구의 침탈을 막고자 대가람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면서 더는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단명에 그쳤다는 논고를 내놓아 주목을 받았다.
경주/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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