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김 "다음 작품은 '심청'.. 영혼 담긴 우리 소리의 파장 그릴 것" [무대 밖 이야기]
내년 8월 국립극장 소리악극 '심청' 선봬
파이낸셜뉴스와 국립오페라단이 공동주최한 오페라 ‘탄호이저’가 지난 10월 20일 관객들의 뜨거운 호응 속에 막을 내렸다. 한국에서는 45년만, 원어로는 처음 선보인 바그너 오페라에 대한 관심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폐막 이후에도 다양한 이야깃거리, 생각할 거리들을 남겼고, 여운도 깊었다.
'탄호이저'는 사랑을 통한 구원을 노래한 작품이다. 이번 공연에 연출로 참여한 요나 김은 ‘육체적 쾌락’을 상징하는 베누스 캐릭터가 입체적으로 설명되는 파리 버전(1861년)과 드레스덴 초연 버전(1845년)을 섞어 ‘뉴 탄호이저’를 탄생시켰다. 시대와 배경을 뚜렷이 규정하지 않는 연출 덕에 오페라는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이야기로 치환됐다.
독일 만하임 국립극장 상임연출가인 요나 김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하지만 이번 ‘탄호이저’를 비롯해 내년 8월 국립극장과 전주세계소리축제가 선보일 소리악극 ‘심청’으로 또다시 한국 관객들을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연출가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총괄하지만 정작 그 모습은 무대 밖에 있다. 폐막 후 3주를 더 서울에 머물며 달라진 한국의 모습을 바라본 그는 어떤 새로운 영감들을 얻었을까. 다음은 요나 김 연출과의 일문일답이다.
―‘탄호이저’ 이후 어떻게 지냈나.
▲작품 하나가 끝나면 머릿속에서 바로 이사가 시작된다. 작품에 대한 파편들, 또 보여주지 못한 것들, 그런 생각들이 널브러진 짐들처럼 남아 있는데 그걸 정리하고 비우는 작업을 한다. 그리고 다음 작품을 향해 가는 것이다. ‘꼭 필요한 것과 버려야 하는 것은 뭐지’라는 생각으로 가득 찬다. 필요한 짐만 싸서 새로운 집으로 이사 가는 일과 비슷하다. 이번에는 그 과정이 더욱 과도기처럼 느껴졌다. 고국인데다 여러 가지 요소가 상충되면서 이사가 좀 격렬해졌다고 할까. 공연을 하면서 스태프들의 열정과 실력에 놀란 순간들이 여전히 생생하다. 공연을 하면서 모든 걸 태운 것 같은데 감동의 흔적이 불탄 자국처럼 남아 있는 느낌이다. 백인 남성의 시각에서 쓴 ‘탄호이저’에서 완전히 다른 장르인 ‘심청’으로 서서히 넘어가는 중이다.
―한국에 자주 오나. 서울의 변화를 많이 체감하는지.
▲정해진 건 없다. 어떨 때는 몇 년 동안 안 온 적도 있고, 두 달가량 이렇게 오래 머무른 건 이번이 처음이다. ‘탄호이저’ 공연이 끝나고 여기저기 둘러볼 기회가 많았는데 시각적으로는 ‘다이내믹 코리아’ 그 자체다. 내가 모르는 건물이 서 있고 새로운 음심점도 생겨나 있고. 유행이 굉장히 빠르게 오고 또 그만큼 휘발성도 강한 것 같다. 순환이 엄청 빠른 거다. 반대로 유럽은 굉장히 느린 대륙이다. 그곳에서 1년 걸리는 일이 한국에서는 한 달 내에 가능한데 일하는 방식에서도 다르다는 걸 늘 느낀다.
―서울 여행을 한 셈인데 구체적 일상은.
▲문화계 지인들도 만나고 갤러리도 가고 그랬다. 새로운 작품을 준비하는 동안엔 다른 공연은 보지 않는다.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있어서 경계하는 거다. 오히려 업무 미팅 사이사이 일부러 혼자 걸을 때가 있는데 그때가 가장 좋은 순간들이었던 것 같다. 서울이라는 도시와 내가 정면 대결하는 순간들, 그러니까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고, 이 도시에 대해 설명해 주지도 않는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군중 속에 섞여 걸어가는 것 자체가 그들과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편안하고 좋았다. 그렇게 걷다가 본 석양의 아름다움은 유럽과는 또 달랐다. 우는 것처럼 짧은 시간 빨갛게 이글거리다 휙 사라져버리는 모습이 한국 정서와 닮았다. 무대 연출에 있어 조명 작업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런 빛의 요소를 자세히 보는 편이다. 또 거리를 걸으며 한국 사람들, 다양한 연령대의 패션을 관찰하는 재미가 있었다.
―준비 중인 ‘심청’ 작품에는 어떤 매력이 있나.
▲심청 설화는 인간사에서 정말 너무나 오래된, 원초적인 설화 중에 하나다. 다수의 민중을 통해 전해져온 이야기고, 또 화자가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겠으나 주인공은 여성이다. 관심이 갔던 가장 큰 이유는 소리다. 북소리는 심장 박동 같고, 불완전한 악기인 인간의 목소리에는 그 어떤 장르보다 혼이 담겨 있다. 오페라와 달리 원초적이고 직접적으로 인간의 목소리에 집중하는 과정이 재미있다. 또 오페라는 배우와 오케스트라가 서로 보완해주지만 판소리는 ‘naked(날 것)’한 장르다. 불안하고 불안정한, 한마디로 적나라하다고 볼 수 있는데 그만큼 관객에게 직관적으로 전달되는 힘이 크다.
―‘심청’의 무대 연출 방향성은.
▲판소리는 화자 한 명이 나와서 북 하나로 모든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소설적 3인칭에서 묘사하기도 하고, 또 그러다 갑자기 그 인물에 들어가 직설화법으로 그 인물의 이야기를 한다. 소리꾼은 하나인데 여러 등장인물이 됐다가 또다시 벗어나는 구조들이 참 신기한데 이 부분이 원자의 핵처럼 굉장히 밀도가 있다. ‘불타는 점’ 또는 태양 같은 그 부분을 풀어 극으로 만들고 싶다. 인간의 목소리가 중심에 있고,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가지 파장들이 선과 면, 입체적 공간이 되어 4차원까지 넓혀가는 장치들을 구상하고 있다. 한마디로 소리로 파생된 거대한 태양계를 상상하는 중이다.
―한국 문학을 소재로 한 창작 오페라도 구상 중인가.
▲언젠가 시도해 보고 싶다. 최근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는 독일어판이 출간됐을 때 읽었다. 다른 작품들도 한국어 판본으로 읽어보고 싶다. 또 한국에 있는 동안 다양한 책을 지인들로부터 추천받았다. 최인훈의 ‘광장’, 김만중의 ‘구운몽’ 등. 그중 지인이 선물해 준 ‘꿈꾸다 떠난 사람, 김시습’이라는 책을 밤마다 읽는데 가슴에 와닿는 구절이 많다. 유럽에 있는 동안 한국에서 발간된 책을 거의 읽지 못했는데 한국어의 재발견이랄까, 그런 시간들이다.
―유럽과 한국을 오가며 일하는 건 어떤 느낌인가.
▲한국, 특히 서울은 전 세계적으로 트렌디한 도시가 됐다. 개인적으로는 늘 애절하게 그려왔던 도시인만큼 고국의 품이랄까 너무 특별하다. 요즘 자주 생각하는 문장이 있는데 ‘나는 경계선 밖을 넘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거기서 내 마음을 표현할 새로운 언어를 가지고 다시 그곳으로 넘어오고 싶었다’라는 말이다. 외국에 있다 다시 경계선을 넘어왔는데 여전히 그곳에 있는 게 너무 귀하고, 어떻게 보면 세상에서 나에게 가장 중요한 도시 같다. 특히 이번에 바쁜 틈틈이 걸으면서 서울을 느끼고 관찰하고 놀란 순간순간들이 너무 좋았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한국에서 ‘요나 김’ 연출의 바그너 오페라를 또 볼 수 있을까.
▲‘특정 작품을 하고 싶다’는 의지나 욕심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인생이 계획대로 되는 게 아니고 욕심을 부린다고 이뤄지는 것도 아니지 않나. 작품을 고르는 기준은 갖되, 늘 열린 태도를 유지하려고 한다. ‘탄호이저’ 역시 나를 찾아온 작품이었다. 바그너 작품 중에는 ‘니벨룽의 반지(The Ring of Nibelung)’ 4부작을 한국 프로덕션으로 연출해 보고 싶다. 한국 성악가들이나 제작진이 ‘링’을 할 만한 역량이 충분하고, 한국 관객들도 바그너의 작품을 받아들일 만큼 수준이 높다. 이외에도 좋은 작품이 찾아오면 시간이 되는 한 거부하지 않을 생각이다.
en1302@fnnews.com 장인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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