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언스 톡] 첨단산업 위기가 야근 덜해서 오나

임소형 2024. 11. 14. 1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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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미국과 대만의 경쟁 기업에서는 핵심 인력들이 시간제한 없이 수시로 초과 근무를 해가며 기술 개발에 매달리는데, 우리 기업들은 주 52시간 제도 때문에 충분히 일하지 못해 경쟁력이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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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원인은 빗나간 의사결정
기술 인력 대우해도 부족한데
회사의 책임까지 떠넘겨서야
편집자주
과학 연구나 과학계 이슈의 의미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고, 우리 사회의 다양한 일들을 과학의 눈으로 분석하는 칼럼 ‘사이언스 톡’이 3주에 한 번씩 독자들을 찾아갑니다.
10월 23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열린 ‘제26회 반도체대전(SEDEX)’에 반도체 웨이퍼가 전시돼 있다. 뉴스1

‘엔비디아 밤샘 연구 매달릴 때, 한국 주 52시간에 묶여’. 지난 4일 한 조간신문 1면 기사 제목이다. 다른 신문 2면 제목도 거의 같았다. ‘엔비디아 연구 밤샐 때, 한국 반도체 52시간 족쇄’. 두 기사는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미국과 대만의 경쟁 기업에서는 핵심 인력들이 시간제한 없이 수시로 초과 근무를 해가며 기술 개발에 매달리는데, 우리 기업들은 주 52시간 제도 때문에 충분히 일하지 못해 경쟁력이 뒤처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또 다른 신문은 “R&D(연구개발) 인력 근로 시간 규제 풀어달라”고 반도체 업계가 요구했다며 이를 경제 섹션 머리기사 제목으로 달았다.

당일 주요 경제 신문들도 비슷한 취지의 보도를 쏟아냈다. ‘주 52시간이 허무는 반도체 축적의 시간’ ‘R&D 52시간 족쇄, K칩 초격차 벼랑 끝’ ‘美 기술인재 주 7일 일할 때… 韓 반도체 인력 주 52시간 칼퇴근’. TSMC의 R&D 인력들은 철야에 새벽 근무까지 하고 주 7일 내내 일한다는 등 이들 기사에 담긴 팩트나 사례는 상당 부분 유사했다. 보수 매체로 분류되는 여러 종합일간지와 경제지에 같은 논리를 펴는 기사들이 한날 일제히 실린 것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정치권에서 고연봉 R&D 인력에 대해 주 52시간제 예외를 인정하는 ‘화이트칼라 면제’ 필요성이 제기됐고, 11일 국민의힘이 반도체 R&D 인력에 유연한 근로 시간 적용을 허용하는 반도체특별법을 당론으로 발의했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손경식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이 만나더니 주 52시간 예외 논의가 급물살을 타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그날 고용노동부도 논의가 합리적으로 이뤄지도록 지원하겠다며 말을 보탰다. 잘 짜인 시나리오가 일사불란하게 진행된 듯한 모양새다.

온 나라가 걱정하는 반도체 산업 위기의 핵심 당사자는 삼성전자다. 전문가들과 업계가 지적하는 삼성전자 위기의 원인은 대체로 수렴된다. 인공지능(AI) 시대를 주도할 고대역폭메모리(HBM) 개발 시기를 놓쳤고, 주요 의사결정 과정에서 기술 전문가가 배제됐으며, 총수 일가의 사법 리스크에 발목이 잡혀 있고, 실패와 도전을 용인하지 않는 조직문화가 자리 잡은 탓에 혁신과 멀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위기의 주된 원인은 의사결정 과정과 달라진 조직문화에 있다는 분석이다. 인력 운용이 문제였다면 그 역시 경영진의 역할부터 돌아볼 일이다. 직원들이 야근을 몇 시간 했고 주말에 몇 번 나왔는지가 문제의 본질이 아니란 얘기다.

어떤 제도든 예외를 인정하기 시작하면 범위가 확대될 가능성이 있다. 몇 년째 미래 먹거리라면서 여전히 신약보다 위탁생산 성장에 의존하고 있는 바이오, 중국의 물량 공세와 기술 추격에 쫓기는 배터리 등 다른 R&D 현장도 연쇄적으로 영향을 받을지 모른다. 겨우 자리 잡기 시작한 주 52시간제의 근간이 흔들릴 수 있는 만큼 예외 적용은 신중할 필요가 있다. 근무의 절대량이 정말 문제라면 톱다운 방식으로 여론몰이를 하기보다, 특별연장근로를 비롯한 현 제도의 틀 안에서 개선할 방안부터 현장 인력들과 함께 논의하는 게 우선이다.

그런 과정 없이, 일하는 시간이 줄고 정시에 퇴근한 탓에 반도체 초격차 지위가 허물어졌다고 몰아붙이는 건 경영진의 책임을 직원들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첨단기술 산업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근무 시간을 탓할 건가. 이러니 이공계 인재들이 엔지니어의 길을 외면하고 재벌도 국회도 정부도 어려워하는 의사가 되려 하지 않겠나.

임소형 미래기술탐사부장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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