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기도 박물관·미술관 다시보기] 34. 이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소나무 줄기를 감은 담쟁이덩굴에도 빨갛게 단풍이 물들었다. 이천시 대월면 대평로214번길 10-13에 자리한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 마당에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가득하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관장 한동인)은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기독교 복음이 우리 땅에 들어오기까지의 과정, 조선 말에 시작된 근대화와 기독교 복음의 선교 역사, 민족의 수난기였던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한국 교회의 모습, 민족의 분단과 해외 선교까지 한국 기독교의 역사를 오롯이 보여준다.
■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보여주다
박물관을 설립한 사람은 문서선교에 헌신한 향산(香山) 한영제 장로(1925∼2008)다. 향산은 한국기독공보 사장을 지내고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과 한국장로교회협의회장을 지낸 독실한 기독교인이며 1985년 한국출판문화상을 수상한 유명 출판인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향산은 1955년 대구 평북교회의 이성호 목사 등 신앙 동지들과 문서선교 기관인 정문사를 설립하고 1956년 기독교문사로 출판 등록을 한다. 출판 자료를 위해 고서점을 뒤지며 기독교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그는 빠르게 사라져 가는 문헌 자료를 보관해야겠다는 사명감을 느끼고 기독교는 물론이고 한국의 역사와 종교, 철학, 문화에 대한 자료까지 수집하기 시작한다. 이런 노력으로 도서와 잡지, 신문, 사진, 필름, 유물을 합쳐 10만여점을 모았다. 설립자 한영제 장로의 호 ‘향산(香山)’은 설립자의 고향 마을 이름이다.
기독교가 대한민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12월30일까지 열리는 ‘제21회 기획전시 향산 15주기 추모전-선교의 여명’은 기독교가 들어오기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기획전시가 열리는 2층으로 올라가는 벽면에도 기독교 전파의 역사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1611년, 사신으로 명나라를 방문한 지봉 이수광(1563~1629)이 북경에서 천주교 사제들과 교류한다. “이 나라에 이마두란 자가 지은 천주실의 2권의 첫머리에서는 천주가 천지를 창조하고 편안히 기르는 도를 주재한다는 것을 논하고 다음으로 사람의 영혼은 불멸의 것으로 금수와는 크게 다르다는 것을 논하였으며….” 기독교와 마주한 조선 선비의 감정은 두려움보다 설렘이었던 것 같다. 1644년 9월, 소현세자가 북경 천주당을 방문해 아담 샬과 교류한 사실도 마찬가지다. 1720년 9월 정사 이이명의 자제군관으로 사행에 참여한 이기지(1690~1722)가 천주당을 방문해 선교사와 교류하고 남긴 ‘일암연기(一庵燕記)’에 이런 말이 실려 있다. “나는 천지의 동쪽 끝에 살고 당신은 천지의 서쪽 끝에 사는데 지금 이처럼 얼굴을 마주하게 되니 어찌 하늘이 베푼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1784년 이승훈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한 사실에서 스스로 천주교를 수용한 한국의 독특한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1884년 소래교회 신앙공동체가 형성된다. 개신교 역시 선교사가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던 사실을 알려준다. 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인천항에 도착하고 8월에 배재학당, 이듬해 5월에 이화학당이 개교해 신교육을 시작한다. 1887년 정동교회(새문안교회)가 설립되고 20년이 지난 1907년 첫 조선인 목회자 7인이 평양신학교를 졸업한다. 이런 사실을 보여주는 흑백사진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살펴보는 재미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기독교가 한국에 전파되기까지의 경로를 한눈에 보여주는 대형 세계지 앞에 선다. 이승재 학예사가 손가락으로 한국과 일본 사이를 가리키는 곳에 ‘MER DE COREE’라는 글씨가 또렷하다. “당시 서양인들도 동해를 한국해로 알고 있었던 것이지요.”
■ 시대의 어둠을 밝힌 한국 기독교
저 낡은 책은 무슨 사연을 들려줄까. “한국 기독교 140년의 역사를 보여주는 성경책입니다. ‘마가의 전한 복음서 언해’는 기독교와 한글의 관계를 잘 보여줍니다.” 1882년 일본사찰단으로 도쿄에 갔던 이수정이 기독교에 입교하고 세례를 받은 후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1884년부터 성서를 번역한다. 1885년 출판한 ‘신약 마가젼 복음서 언해’를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수정해 펴낸다.
1900년대 초 한글 보급에 앞장섰던 한글학자 주시경과 상동교회 목사 전덕기,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의 한 사람인 이필주 목사의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는 한 장의 증서가 있다. 주시경과 전덕기가 중심이 돼 상동교회와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비롯한 여러 학교에서 청년들에게 한글을 가르쳤던 사실을 알려주는 유물이다. 주시경이 지은 문법책 ‘말의 소리’와 전덕기가 번역한 기도서 ‘일일의력’을 살펴본다. 역시 33인의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의 친필 병풍도 있다. 십자가와 포도가 조각된 기왓장은 무슨 사연을 담고 있을까. 한국인 최초의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기념해 1905년에 세운 나바위성당의 ‘곱새기와’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삼태극과 십자가 문양이 새겨진 기와와 용정 명동촌 윤동주 시인의 생가에서 가져온 기와도 만날 수 있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사용한 타자기와 입체경은 한국 선교의 초창기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이다. 갓을 쓴 사내와 쪽머리를 한 여인, 대여섯 살쯤 되는 아이가 길을 걷고 있다. 그림 위에 ‘긔독도가 집을 떠나다’라는 설명이 붙은 이 책은 1895년 캐나다 선교사 게일(1863~1937)이 번역한 ‘천로역정’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복음을 쉽게 전달하기 위해 한글과 그림을 적극 활용한다.
1924년 창간한 ‘부녀지광’이라는 여성지의 표지가 재미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단체 간행물로 알려진 ‘여자지남’은 1908년 간행한 것인데 표지에 “맹자의 어머니 속이지 아니한 일‘이란 글과 그림을 그려 넣을 정도로 실험적이다. 1906년 6월 창간된 기독교 월간 잡지 ‘가정잡지’는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가 유성준, 양기탁, 주시경 등과 협력해 부녀자들을 깨우치자는 목적으로 발간한 것인데 표지 디자인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벌이던 김죽림과 차경신의 한글 편지도 있다. 독립운동에 헌신한 두 분의 글씨가 활달하고 시원시원하다. ‘뎡말나라 연구’는 무슨 책일까. 1930년대에는 덴마크를 뎡말이라 표기했다. ‘정말과 정말농민’이란 책도 전시돼 있어 선진국인 덴마크를 연구하는 바람이 조선에 불었던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황성기독교청년회 하령회 사진은 달리기를 준비하는 월남 이상재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소탈한 모습을 보여준다. 1910년 6월, 한국 최초의 기독교 학생 여름 수양회가 열린 곳은 서울 근교의 진관사라는 절이다. 불교와 기독교가 협력했던 역사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진이다. 한국기독교역사박물관은 기독교 전파 초기에 양반과 남성, 어른 중심의 조선 사회에서 상민과 여성과 어린이를 주목하고 이들을 위해 헌신한 선교의 역사를 손때 묻은 유물을 통해 생생하게 보여준다.
■ 한국 기독교의 오늘을 성찰하는 공간
박물관 마당에는 20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1백주년’을 기념해 장대현교회를 축소 복원한 건물이 서 있다. 초기 기독교의 건강한 정신을 회복하자는 뜻이 담긴 건물이다. 한국 기독교는 대한민국을 탄생시킨 3·1운동의 중심이었다. 안창호, 손정도 등 임시정부의 핵심 요인과 무장투쟁에 나섰던 독립군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다. 이처럼 한국 기독교는 고난과 절망의 시대를 밝힌 등불이었다.
문득 2024년 현재 한국 기독교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궁금하다. 예수의 가르침대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에게 좋은 친구인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있는가. 대한민국의 장래를 고민하며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기독교인들의 성찰과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권산(한국병학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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