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출된 독재자의 망상과 몰락 [뉴스룸에서]
조일준 | 토요판부장
꼭 80년 전인 1944년 11월, 아돌프 히틀러는 생애 마지막 가을을 나고 있었다. 전선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암울했다. 그해 나치 독일은 거의 모든 전선에서 연합군의 공세에 밀리기 시작했다. 6월 미군과 영국군이 주축인 연합군이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성공했다. 불과 한달 새 150만명의 병력이 서부전선에서 독일 점령지들을 해방하며 제3제국(나치 독일)의 본토로 향했다. 9월에 연합군이 독일 서부 국경을 넘었다.
한달 뒤에는 동부전선에선 역시 연합국이던 소련의 군대가 동프로이센(오늘날 폴란드 동북부) 국경을 돌파했다. 소련군의 빠른 진군 속도에 놀란 히틀러는 11월1일 폴란드 남부에 위치한 아우슈비츠(오시비엥침) 절멸 수용소의 독가스 학살 중지와 증거 인멸을 명령했다. 12월 독일은 서부 전선에서 최후의 대반격(벌지 전투)을 시도했으나 한달 만에 대패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나의 투쟁’이 나치 독일의 몰락으로 치닫는 사실을 애써 외면했다. 위대한 아리안 인종이 건설할 ‘대독일제국’(Greater Germanic Reich)의 꿈이 안개처럼 흩어지는 걸 붙잡으려 몸부림쳤다. 전멸하거나 패퇴해 더는 존재하지 않는 부대에 ‘결정적인 공격’을 명령했다. 군 최고지휘부의 보고는 믿지 않거나 격노하며 책임을 추궁했다. 선전장관 괴벨스는 그저 맞장구를 쳤다. 히틀러에게 직언할 참모들은 없었다.
연합군이 동서 양쪽에서 포위망을 좁혀오고 독일의 패색이 완연해지자, 히틀러는 베를린의 총리 관저 지하 벙커로 숨어들었다. 앞서 7월, 히틀러는 군부 내 고위 장교들이 군사회의 중 자신을 폭살하려던 시도(발퀴레(Walküre) 작전)에서 운 좋게 살아남았다. 대대적인 관련자 색출 작업 끝에 5천여명의 군부 인사와 시민이 처형됐다. 암살 미수 사건은 히틀러를 더욱 자기만의 세계로 고립시켰다. 히틀러는 점점 더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렸고 종종 비현실적인 기대와 망상에 의존했다.
1945년 1월, 히틀러는 대국민 라디오 연설을 했다. 그는 마지막이 된 이 연설에서도 “이 운명적인 전투에서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명령이 있을 뿐”이라며 “모든 건강한 독일인이 개인적 안위를 고려하지 않고 끝까지 싸울 것”을 요구했다. “지금의 위기가 아무리 심각하더라도 결국은 우리의 변함없는 의지, 희생을 감수하는 자세, 우리의 능력에 의해 극복될 것”이라며 “최후의 승리”를 호언했다. 현실을 회피한 거짓말, 죽음의 선동이었다.
3월에는 적들에게 아무 것도 내어주지 않겠다며 독일 전역의 초토화를 명령했다. 여기에는 “패전한 독일 민족 또한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는 극단적 약육강식의 세계관이 깔렸다. 4월22일 마침내 소련군이 베를린에 진입해 시가전이 벌어졌다. 28일에는 파시즘의 동반자인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파르티잔에 붙잡혀 총살당했다. 이틀 뒤인 30일,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하루 전에 결혼식을 올린 애인 에바 브라운과 동반 자살했다. 히틀러는 자녀가 없었다. 대신 반려견 블론디를 끔찍이 아꼈는데, 자살하기 직전 개를 먼저 안락사시켰다.
앞서 1933년 1월 히틀러는 민주적 선거에서 유권자 3분의 1의 지지만으로 독일 총리직을 거머쥐었다. 1930~1932년 새 세차례나 치러진 총선에서 단독 과반 정당이 나오지 않자,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결국 1932년 11월 총선의 제1당(득표율 33.1%)인 국가사회주의노동자당(나치) 지도자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내내 2, 3위를 차지한 좌파 정당 사회민주당과 독일공산당은 물론, 보수 우파 정당들도 나치와의 연정을 거부하면서 정부 공백 상태가 길어진 데 따른 고육책이었다.
히틀러는 집권 두달 만에 의회를 해산하고 전권위임법(수권법)을 통과시켜 국가 권력의 전부를 장악했다. 이어 다른 정당들을 해산하고 나치당을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 만들었다. 1934년 8월 힌덴부르크가 사망하자 히틀러는 대통령제를 폐지하고 국가원수를 겸하는 ‘총통’에 올랐다. 이후 치러진 몇차례 총선에서 유일 정당 나치는 99%를 넘나드는 압도적 ‘찬성’ 표를 받았고, 히틀러는 무소불위의 권력자가 됐다.
히틀러는 의회 민주주의를 경멸했고, 정치적 반대자를 철저히 숙청했으며, 자신을 국가와 동일시했다. 자신에 대한 비판은 독일에 대한 공격이자 반역으로 간주했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비뚤어진 이념에 붙들린 전쟁광이자 끔찍한 학살자였다. 그 최종 결과는 유럽의 경제·문화·군사 강국이던 독일의 파멸과 군인·민간인을 합쳐 최대 8천만명의 죽음이었다. 히틀러는 권력을 위임받은 정치인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대표적 인물 중 하나다. 국정 지지율이 20% 아래로 곤두박질친 윤석열 정부도 그 이유를 곱씹었으면 좋겠다.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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