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맨은 노루궁뎅이 찾아왔나?" 그가 남긴 GPS를 따라가다 [낭만야영 대미산]
늦더위가 한풀 꺾이고, 아침 저녁으로 찬기운이 시큰하게 스며드는 10월이다. 가을 단풍 소식에 너나 할 것 없이 설악산으로 떠난다고 난리다. 올 가을도 대청봉은 매일같이 만석일 듯하다. 연례 행사처럼 떠났던 가을 단풍산행은 뒤로 하고 조용히 쉴 곳을 찾아보기로 했다.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가 등산 어플 '램블러'를 클릭했다.
검색란에 '백두대간'을 입력하자 방대한 양의 트립이 나열됐다. 화면을 한참동안 쓸어 내렸다. 그러다 사진 한 장 없이 왕복으로 원점회귀한 몇 년 전의 GPS기록을 발견했다. 위치 설명도 없이 그냥 '백두대간'만 적혀 있는 닉네임이 X로 시작하는 사람의 트립이었다. 지도를 클릭해서 들어가 보니 문경 대미산 쪽이었다. 왕복이라고는 하지만, 대미산 정상에도 하늘재에도 닿지 않은 채 중간까지만 왕복한 것이었다. 마침 산행 시기도 가을이었다. 문득 이 길이 궁금해졌다. 여기로 가야겠다. 이름하여 'X맨과 하찮은 가을 백패킹' 이라고나 할까? 이번에는 무거운 드론과 DSLR 카메라는 챙기지 않을 것이다.
X맨의 흔적을 좇아가다
문경 터미널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중평리로 가는 길에는 가을 냄새가 물씬 풍기는 황금 들판이 펼쳐졌다. 길가에는 탐스럽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차창을 열고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으나, 문경 사과 자랑에 여념이 없는 기사님의 말을 끊고 싶지 않았다. 들머리에 도착했다.
택시를 보내고 나니 빨간 사과가 눈에 들어왔다.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멋진 모형 독수리만이 바람에 이리저리 돌고 있었다. 어릴 적 시골에서 서리를 많이 했었다. 지금은 범죄행위겠지? 하찮은 백패킹을 하러 와서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었다. 아침에 냉장고에서 집어 온 사과 두 개가 맛있길 바라며 산행을 시작했다. 하늘은 꾸물꾸물했다. 우천 대비는 하지 않았지만, 비가 와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X맨의 발자취가 궁금할 뿐, 비가 오면 멈추면 되는 것이었다. 아직도 수확하지 않은 빨간 오미자 덩굴 밭을 지나, 산길로 들어섰다. 바닥에는 밤송이가 가득했다. 한동안 사람이 없었던 듯 알밤이 그대로 있었다. 한 움큼 주워 배낭 포켓에 넣었다. 어쩌면 밤이 길지도 모르니 밤이나 까먹을 심산이었다.
쌀쌀한 날씨에 안개까지 더해져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된비알을 올라섰다. 맑은 날이었다면 볕이 잘 들만 한 자리에 무덤이 있었다. 추석이 지났음에도 잡초가 무성했다. 무릎 높이의 작은 소나무가 군데군데 자란 걸 보니, 떨어진 솔방울이 싹을 틔워 저만큼 자라는 동안 아무도 찾지 않은 듯했다. 쓸쓸한 무덤 옆에서 숨을 고르고 다시 걸었다. 지그재그로 이어진 가파른 오르막은 쉴 틈을 주지 않았다. 군데군데 멧돼지가 땅을 헤집어 놓았다. 멧돼지를 쫓으려고 스틱으로 탁탁 소리를 내며 올랐다.
부리기재는 대미산 정상과 하늘재의 갈림길이다. X맨은 하늘재로 향했다. 15년 전 잠깐 백두대간을 하면서 걸었을 길이지만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3km쯤 가자 공터가 나왔다. 앞뒤로 시그널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잠시 배낭을 내리고 앉았다. 어차피 외길이었지만 X맨의 GPS를 확인했다.
어라? 그는 대간길 능선에서 벗어나 북쪽 능선으로 내려갔다. 맞다. 처음 이 GPS를 발견했을 때, 이 구간이 궁금했다. 이렇게 버젓이 시그널이 있는데, X맨은 왜 이 길로 내려간 것일까? 심마니였을까? 아니 어떤 심마니가 좌표를 공개하나 싶어 생각을 접고 그를 따라 내려갔다. 여전히 길은 없었다. 방향만 잡은 채 잡목들을 헤치며 내려갔다. 고꾸라질 듯 가파른 경사 길이거나 돌아서 내려가야 하는 암벽이거나. 길이 평탄하지는 않았다. 이 정도 험난한 길이라면 산삼이 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였다. 얽히고설킨 잡목에 긁히고 쓸리고 따귀를 맞으며 무아지경으로 내려갔다. 이건 하찮은 백패킹이 아니고, 고난의 백패킹이었다.
마침내 GPS의 회귀점 근방에 다다랐다. 우거진 숲 속의 가파른 경사면으로 아무런 풍경도 없었다. 마을로 내려가는 게 더 빠른데, X맨은 왜 힘든 경사면으로 되돌아 올라갔을까? 의문만 남긴 채 그의 발자취를 포기하고 능선으로 올라갔다. 근처 텐트 한 동 칠 만한 공터를 찾아서 하룻밤을 보내고 마을로 내려갈까 했지만, 대미산 정상 근처에 샘물이 있어서 물을 여유 있게 챙기지 않은 탓에 다시 올라가기로 했다. 너무 화이팅 넘치게 내려온 탓에 체력이 거의 방전됐다. 아무 수확도 없이 올라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잡목들이 눈을 찔러 대는 통에 눈을 감고 길을 고르느라 심봉사가 된 기분이었다.
사투 끝에 시그널이 붙어 있는 공터에 올라섰다. 배낭을 내리고 털썩 주저앉았다. X맨은 무슨 생각으로 이 길을 걸었던 것일까? 왜 굳이 GPS를 공유해서 이 고생을 하게 만든 것일까? 결국에는 애초에 그 누구도 하지 않을 짓을 한 호기심 많은 나를 탓했다. 바나나 우유를 꺼내 마셨다. 달콤함이 입안 가득 채워지면서 허기와 갈증이 사라졌다. 해가 지기 전에 샘터를 찾으려면 서둘러야 했다.
샘물이 말랐던 이유
대미산 정상에 가까워지자 온통 안개에 휩싸였다. 으스스한 분위기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따금씩 스틱을 탁탁 쳤다. 행여나 고라니나 멧돼지가 나타나면 놀라 기절해 버릴까 봐 나름 고안한 최선의 방어책이었다. 하루 종일 사람 그림자도 만나지 못한 채 대미산 정상에 도착했다. 잡초가 무성했다. 재빨리 텐트를 쳤다.
작은 정상석과 함께 사진을 찍고 보니 분위기가 음산했다. 텐트가 샌드(모래) 색상이다 보니 무덤 같았다. 짐을 텐트에 밀어 넣고 눈물샘을 찾아 반대쪽으로 내려갔다. 시간상 10분을 내려간 후 '눈물샘' 이정표에서 샛길로 다시 7분 정도 내려가면 샘터가 나오는 걸로 되어 있었다. 고도상으로 약 110m를 내려가야 했다. 하지만 아무리 내려가도 이정표가 보이지 않았다. GPS 시계를 체크하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보았지만 이정표는 없었다. 비바람에 떨어져 나간 건지도 모르겠다. 결국 한 시간여를 헤매다 해가 지는 바람에 텐트로 되돌아왔다.
어둠이 내린 숙영지는 한층 더 스산해졌다. 별 사진을 찍는 둥 마는 둥 재빨리 셔터를 누르고는 텐트 안으로 들어왔다. 밝은 방어벽 안으로 들어오니 안심이 되었다. 몇 모금 남지 않은 물을 아껴 마셨다. 어차피 저녁식사는 삼각 김밥과 맛은 증명되지 않았지만 과즙이 있으니 물이 많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다만 다음날 작은 차갓재까지 가려면 물이 꼭 필요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눈물샘을 찾겠다며 다짐하고 피로감에 눈을 감았다. 서럽게 울어 대던 고라니도 금세 조용해졌다.
묘지 같은 곳에서 하룻밤을 보낸 것 치고는 꿀잠을 잤다. 남은 물을 마시고 눈물샘을 찾아 내려갔다. 전날은 해가 질까봐 조급한 마음에 이정표를 놓쳤을지도 모르니, 천천히 찾아보기로 했다. 우거진 나무 틈새로 아침 햇살이 새어 들어왔다. 갈증 빼고는 상쾌한 아침이었다. 지도상으로 눈물샘으로 빠지는 위치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다. 다만 샛길에 쓰러진 나무 하나가 가로질러 있을 뿐이었다. 전날 긴가민가해서 내려가다가 되올라 왔던 길이었다. 나무를 넘어 다시 내려갔다. 블로그에 나온 고도보다 한참을 더 내려갔다. 우거진 수풀에 가려져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샘터가 나타났다. 대미산 정상처럼 블로그 사진보다 잡초가 무성했다. 샘물이 흘러나오는 호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다만 늪처럼 발이 푹푹 빠지는 흔적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제서야 이정표가 사라지고, 샛길에 나무가 놓여 있던 이유를 알아챘다.
폭우로 흙이 무너져 내려 샘물을 막아버린 것이다. 물이 없다는 걸 알고 나니 갈증이 심해졌다. 진흙이 된 땅을 파냈다. 땅을 팔수록 물이 고이더니 땅 샘처럼 물이 뽀글뽀글 솟아나왔다. 흙탕물을 한참 흘려보내고 나니 맑은 물이 흘러나왔다. 물웅덩이가 흘러가는 좁은 수로에 넓은 풀잎을 깔았다. 그리고 물을 떠 투명한 페트병에 담았다. 텐트로 돌아와 페트병을 세워 두었다. 숙영지를 정리하는 동안 불순물을 가라앉힌 물을 물통에 옮겨 담았다. 아직 흙냄새가 나긴 했지만 마실 만했다.
대왕 노루궁뎅이버섯 발견
배낭을 메고 다시 부리기재로 내려갔다. 안개가 자욱했던 전날과 달리 맑은 날씨에 시야가 넓어졌다. 나무를 감싼 이끼와 이름 모를 버섯들, 이슬 맺힌 거미줄마저 싱그러움이 감돌았다. 이른 아침부터 갈 길이 바쁜 프로 백두대간러 개구리 선생까지 평소엔 하찮아 보였던 모든 것들이 귀엽고 앙증맞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숲 안쪽 나무 중간에 하얀 덩어리가 눈에 들어왔다. 10m 안쪽임에도 확연하게 눈에 띄는 걸 보면 어마어마한 크기의 노루궁뎅이버섯이었다. 노루궁뎅이버섯은 몇 년 전 설악산 종주할 때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나무 가까이 다가갔다. 두 손을 쫙 편 크기의 버섯 두 덩이가 위 아래로 달려 있었다. 하찮았던 1박2일에 가장 큰 이슈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문득 X맨이 이 계절에 이 산을 찾아 그 험한 길을 돌아 다녔다면, 산삼이 아니라 버섯을 따러 다녔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파르게 올라왔던 만큼 하산도 빨랐다. 독수리가 지키는 과수원에 도착했다. 갈증 때문인지 탐스러운 사과는 더욱 맛있어 보였다. 마침 과수원을 돌아보는 아주머니에게 사과가 맛있어 보인다며 몇 개만 살 수 있는지 물었다. 아주머니는 말없이 탐스러운 사과 하나를 낚아채더니 나에게 내밀었다.
"문경 사과가 맛있지."
그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갈 길을 가셨다. 사과를 한 입 베어 물었다. 달콤한 과즙이 입안의 갈증을 해소시켰다.
'사과는 문경 사과가 최고다.'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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