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날, ‘교육 내전’ 종식을 꿈꾸며 [세상읽기]
이병곤 | 제천간디학교 교장·건신대학원대 대안교육학과 교수
어느 공립학교에 마련된 학부모 강의를 맡았다. 일찍 도착하여 교장 선생님과 차를 나눈다. 바로 전날 어떤 학부모가 자녀에 대한 아동 학대법 위반으로 담임교사 한 사람을 고소한 사건에 대해 말을 전한다. 상심과 압박감이 크셨나 보다. 상황을 전하는 교장 선생님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이내 눈시울이 붉어졌다.
강의를 마쳤다. 모두 흩어지는 순간, 자그마한 체구에 맑은 눈빛을 띤 어머니 한분이 상담을 요청한다. 최근 학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고교 2학년 따님에 대한 기대와 걱정, 안타까운 기다림의 심정을 전한다. “그래도 끝까지 아이를 믿고 지지해야겠지요?” 내게 던지는 것이었으나 마치 본인에게 다짐하는 듯한 질문의 끝자락. 벌써 그분의 동공에는 불안 가득한 눈물이 뿌옇게 번진다.
되돌아오는 열차 좌석. 몸도, 마음도 흔들린다. 나는 잠깐 들른 외부인으로서 그 학교에서 반나절 머물렀을 뿐이다. 짧은 순간에 교장의 눈물과 부모의 눈물을 동시에 목격하다니. 믿음으로 아이들을 넉넉히 품어야 할 우리의 교육공동체가 날 위에 서 있고, 고립되어 있음을 실감했다. 착잡하다.
교육적 우울. 교육학자 이수광(2023)은 “교육 주체 각자가 존재를 부정당하고, 구체적인 교육활동 과정에서 소외감, 체념, 무기력을 경험하는” 현상을 가리켜 이렇게 표현했다. 우울감이 사람의 판단과 행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나도 훤히 안다. 후회와 원망을 지나 두려움과 극도의 자기 보호 감정에 휩싸인다. 흔들리는 마음이 여러 종류의 관계 폭력이나 학업 성적 관련 사안 등 교내 미묘한 사건과 연결되면 분쟁으로 번진다. 억울한 감정이 솟구친다. 누구나 ‘을’의 처지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과격하게 꾀하려는 행동을 정당화한다.
교사는 이런 사태에 휘말리는 일이 가장 부담스럽다. 학부모 또는 학생과 관계를 구축할 때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너무 깊이 개입하지 않기, 관심 끊기, 흠잡히지 않기, 절전 모드로만 관계 맺기를 선호한다. 문제가 생기면 복잡하게 마음 쓰지 말고 사법적 절차를 따르면 될 일이다. 그 결과 우리 교육공동체 구성원은 누군가 바늘 하나만 잘못 놀려도 아픔을 크게 느낀다. ‘상처 입기 쉬운 조직’으로 변모한 것이다.
정용주(2024) 교장의 진단에 따르면 현재 한국 사회는 “가족을 단위로 한 ‘교육 내전’ 상태”에 들어섰다. “수능과 정시는 포스트 시즌이며, 특목고 입시도, 어느 학원에 들어가느냐 하는, 사교육 입시의 하위 리그”에 지나지 않을 뿐이란다. 이 기막힌 내전에서 야전 병원은 전국의 소아·청소년 정신과다. 2023년 한해 30만7097명의 아동·청소년이 진료를 받았다. 4년간 환자 수가 64.8% 늘었다. 주요 대학병원 소아·청소년 정신과는 3~5년을 대기해야 진료받을 수 있다고 한다(한겨레 10월25일치).
우리 아이들을 살리려면 ‘즉각 휴전’이 필요하다. 그럼에도 숱한 동시대인들은 이 지리멸렬한 교육 내전을 쉽사리 끝내지 못한다.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이 실력을 쌓는다→공정한 시험 과정을 거쳐 자신이 원하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한다→피라미드 꼭대기에 선 사람이 사회적 혜택을 누리는 것은 마땅하다.’ 개인은 무한 자유를 꿈꾸지만, 신기하게도 ‘가족-개인’은 사회 통념을 따르는 보수적 성향을 고수한다. 거의 모든 ‘가족-개인’이 이런 신념을 갖고 있기에 경쟁 체제는 안락하게 유지된다. 그 결과 학교는 ‘학생들의 능력을 올바로 측정하라’는 변별 압력을 거세게 받는다. 능력주의와 공정 담론이 결합하여 빚어낸 교육 현상이다.
대안학교와 연계된 교육 3주체들은 무의미한 경쟁 내전에 휘말리기 싫어 ‘공교육 나라’를 자발적으로 탈출한 교육 망명객이다. 그렇다고 마냥 행복을 누리지는 못한다. 사회 전체의 공기가 답답한데 어찌 대안학교 교정 위의 하늘만 쾌적할 수 있겠는가. 제도권 곁에서 우리가 무엇인가 잘한다 한들 망명 정부라는 우울한 운명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치러지는 오늘 아침, 간절하게 외친다. 무의미한 경쟁을 멈추라. 그리하면 학부모, 학생, 교사 사이에 사막화된 관계가 복원될 것이다. 눈물을 거둘 수 있다. 교육공동체의 회복만이 우리 아이들을 살리는 힘이다. 자유로운 아이들과 광야에서 30년 가까이 버텨온 대안학교의 역사가 그것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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