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 앞바다서 침몰 사고… 고향엔 묘소 없이 한글 비석만
[2] 아펜젤러와 수더턴 생가·교회
1902년 6월 11일 밤 11시쯤, 군산에서 서쪽으로 37㎞ 떨어진 어청도 서북쪽 바다. 제물포를 떠나 목포를 향해 순항하던 558톤급 기선 구마가와마루(球摩川丸)에 675톤급 기선 기소가와마루(木曾川丸)가 충돌했다. 뱃머리를 들이받힌 구마가와마루는 순식간에 앞쪽 절반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 배에는 목포에서 열리는 성서번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길이던 헨리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와 그의 배재학당 조사(助事) 조한규(혹은 조성규), 목포 출신 여학생이 함께 타고 있었다. 배는 2분 만에 침몰했고, 아펜젤러 선교사는 46명 승객 중 실종·사망한 18명 중 한 명이 되고 말았다.
아펜젤러와 동승했다가 가까스로 구조된 미국인 광산업자 J F 볼비는 아펜젤러의 마지막 모습을 “허리까지 잠긴 물 속에서 잡히지 않는 무언가를 더듬어 잡으려고 애쓰고 있었다”고 전했다. 아펜젤러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첫 개신교 선교사로 제물포항에 내린 지 17년, 당시 그의 나이는 44세였다. 배재학당을 세워 조선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한국 감리교의 어머니 교회인 정동제일교회의 전신 벧엘 예배당을 세웠던 아펜젤러는 조선의 바다에 묻혔다.
조선에서 봉사한 다른 선교사 윌버 스웨어러(1871~1916)는 그해 아펜젤러 선교사 추도사에 이렇게 썼다. “아펜젤러에게 결점이 있다면 그것은 너무나 자기희생적이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한국인을 위해 오랫동안 희생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 순간에도 한국인을 위해 자기 생명을 바쳤다는 말이 지금 한국인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습니다. 이들은 그가 살려면 살 수 있는 충분한 조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 교사와 어린 소녀를 깨우려 노력하다가 희생당한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난달 30일 미국 동부 펜실베이니아의 한적한 시골 수더턴의 마을 묘지. 조선의 바다에 묻힌 아펜젤러의 육신 대신 그의 위대한 헌신을 기리는 순직비가 서 있었다. 검은색 묘석 앞면엔 그의 얼굴과 생몰일이, 뒷면엔 ‘한국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복음을 전해 죽어가는 영혼들을 살리는 데 앞장섰다’는 비문이 새겨졌다. 여기서 멀지 않은 아펜젤러의 고향 교회 ‘임마누엘 레이디스 교회’의 존 니더하우스 담임목사는 “2021년 한국의 성도들이 세워준 것”이라고 전했다. “저는 36년 전 이 교회에 오기 전엔 아펜젤러 선교사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15년 전 한국인 신학생에게서 아펜젤러에 대해 문의를 받았고, 그분의 헌신에 관해 공부하게 됐지요. 여전히 한 달에 한두 번은 한국의 순례객들이 찾아옵니다. 그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우리 교회는 매달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 30~40명의 생활 자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교회 내부 벽에는 일본, 루마니아, 태국, 인도 등 ‘아펜젤러의 후예들’이 파송된 선교국을 표시한 세계 지도와 선교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다. 예배 참석 성도 300명 안팎인 작은 시골 교회가 매달 30~40명의 선교사를 후원하는 열매를 맺은 것도 놀라운 일. 이 역시 아펜젤러 선교사의 유산이다.
아펜젤러는 개신교 최초의 한국어 세례식과 여성 세례식을 집전했고, 최초로 한국어로도 설교했다. 아버지를 삼켜버린 이역만리 조선 땅에서, 아펜젤러의 자식들도 조선인들을 위해 헌신했다. 딸 엘리스 레베카 아펜젤러(1885~1950)는 이화학당의 6대 당장(堂長)을 지낸 한국 여성 교육의 선구자. 아들 헨리 닷지 아펜젤러(1889~1953)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배재학당의 당장으로 20년간 조선 청년들을 가르쳤다.
1885년 언더우드와 함께 제물포에 처음 조선 땅을 밟은 그의 여정의 시작은 뉴저지 드류 신학교다. ‘청년’ 아펜젤러가 신학을 공부했던 이 학교에는 그가 학교에 입학하며 친필로 남긴 글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곳에서 만난 외증손녀 실라 플랫(76) 여사는 “실제로 뵙진 못했어도, 유년 시절부터 아펜젤러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가족에게 들으며 성장했다”고 전했다.
“근래 들은 가장 아름다운 일화는 할아버지가 언더우드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항에 내릴 때의 얘기였어요. 두 분은 장로교와 감리교로 교단은 달랐지만 어서 조선으로 가 아픈 이들을 고치고 배움에 목마른 이들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은 하나였죠. 그래서 두 분이 합심하셨대요. ‘우리, 누가 먼저 조선 땅에 발을 디딜지 다툴 것 없이, 팔짱을 끼고 함께 내리세나!’ 하하하.” 실라 여사는 “”증조부도 처음 1~2년은 낯선 언어와 문화에 어려움을 겪었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영사전 작업을 시작했다고 들었다”며 “덕분에 아버지를 따라 한국에서 선교 활동을 한 외할아버지 헨리 닷지 아펜젤러는 물론, 그 딸인 내 어머니까지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셨다”고 말했다.
/수더턴(펜실베이니아)·매디슨(뉴저지)=이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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