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사일언] 백세 시대의 송년회
요즘은 송년회를 11월에 하는 경우가 많다. 12월이 되면 약속도 많아지고 식당을 잡기도 어렵다 보니 한 달 정도 앞당겨 송년회를 하는 것 같다. 최근 친구들 송년 모임에 몇 번 갔다왔는데 모임에 가면 대화 주제가 항상 정해져 있다.
처음 10분 정도는 “요즘 어떻게 지내냐?” “하는 일은 잘되냐?” 이렇게 안부를 묻다가 누군가 건강 이야기를 꺼내면 한 방에 주제가 건강 이야기로 넘어간다. 그때 나오는 첫 번째 질문. “넌 요즘 무슨 약 먹어?” 누구는 혈압이 높아서 혈압약을 먹는다고 하고 누구는 당뇨가 시작돼서 당뇨약을 먹는다고 하고 누구는 고지혈증이 있어서 고지혈증 약을 먹은 지 오래 됐다고 하고. 그럼 그 얘기를 물끄러미 듣고 있던 한 녀석이 세상 통달했다는 말투로 이렇게 말한다. “난 그 약 세 개 다 먹은 지 5년 넘었어!”
그 순간 친구들의 시선은 모두 그 친구를 향하고 마치 고수에게 한 수 배우려는 듯 질문이 쏟아진다. “처음에 증상은 어떠냐?” “약을 먹으니까 좋아졌냐?” 건강 이야기와 요즘 먹고 있는 약에 대한 대화는 미팅 나갈 때 파트너를 어떻게 정할까 상의할 때보다 훨씬 치열하다. 그리고 누군가 추천한 약이나 건강 보조 식품에 대한 고급 정보가 있으면 바로 메모장에 적거나 그 자리에서 인터넷으로 주문하는 친구들도 있다. 아픈 얘기와 약 얘기를 너무 많이 듣다 보니 건강했던 내 장기도 괜히 아픈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게 건강과 약에 대한 대화가 끝날 때쯤 뒤늦게 온 녀석이 ‘탈모’ 고민을 얘기하면 주제는 또 탈모 쪽으로 확 쏠린다. 최근 탈모가 시작된 친구, 탈모 때문에 약을 먹기 시작한 친구, 탈모 약으로 효과를 봤다는 친구, 그리고 SNS상에 떠도는 탈모 정보를 공유하는 친구까지. 탈모 얘기를 한 시간 넘게 듣고 있다 보면 멀쩡한 내 머리카락도 스르륵 빠지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렇게 건강 얘기와 탈모 얘기만 했는데 어느새 시간은 12시. “연말 마무리 잘하고 내년에 또 건강하게 만나자!”는 인삿말이 마치 1년 동안 혈압, 당뇨, 고지혈증 관리 잘하고 머리털 최대한 덜 빠지게 관리 잘해서 내년에 만나자는 당부처럼 처절하게 들렸다. 백세 시대라는데, 지난 50년 잘 썼으니 앞으로 50년도 잘 써야지.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