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기초학문의 위기
어문학 계열·사회학 폐과 잇따라
취업률 평가·무전공 확대 영향 커
인문학 외면은 국가의 직무유기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사망하기 1년 전인 2010년의 일이다. 잡스는 태블릿 PC인 아이패드 출시를 발표하는 자리에서 “애플이 아이패드 같은 제품들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우리가 늘 과학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자신과 애플의 성공을 인문학 덕분으로 돌린 것이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인문학적 상상력을 발휘한 천재의 말이라 울림이 컸다.
며칠 전 대구대에선 45년 만에 폐과되는 사회학과 장례식이 열렸다. 교수 학생, 졸업생 등이 찾아 마지막을 지켜봤고, 서강대·부산대 사회학과에서 보낸 조화가 자리를 지켰다. 대구대 사회학과는 올해 신입생이 졸업하는 2030년 문을 닫는다. 사회학 없는 사회과학대학은 ‘앙꼬 없는 찐빵’이나 다름없다. 대구대는 사회학과 등 6개 학과를 폐과하는 대신 보건재활학과 등 취업이 잘되는 학과 정원은 늘리고 웹툰·게임 관련 학과를 신설한다.
지방대 위기를 빗댄 ‘벚꽃 피는 순서대로 망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서울이라고 별반 다르지 않다. 덕성여대는 내년부터 독문과와 불문과 신입생을 모집하지 않는다. 동국대는 2009년 독문과를 폐지했고, 건국대는 2005년 독문·불문과를 EU문화정보학과로 통합했다.
인간의 삶을 이끄는 원동력은 인문학이다. 그 뿌리를 토대로 이성적 사고와 윤리적 가치를 더한 것이 사회과학이다. 인공지능(AI)이 생성하는 ‘찍어내는 듯한’ 문구는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데 그친다. 그러다 보니 무미건조하고 인간미가 없다. 소크라테스는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고 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아가기 위한 생각의 원천은 인문학·사회학적 성찰에서 나온다. 냉철한 분석과 대안을 제시하는 비판적 사고는 인문학 없이는 불가능하다.
물론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인문학의 퇴조는 세계사적 흐름 속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생소한 고전을 뜻도 모른 채 외우기에 급급했던 우리의 입시체계에선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성인 10명 중 6명이 1년에 책을 한 권도 읽지 않는 게 현실이다. 동네서점 폐업은 뉴스도 아니다. 전공 간 칸막이가 무너지는 시대상에 맞춰 기초학문도 스스로 경쟁력 제고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정부도 반성해야 한다. ‘의대 광풍’에 따른 N수생 양산과 학문적 불균형은 사회문제로 떠오른 지 오래다. 문·이과 통합 수능에 따른 대입 교차지원도 모자라 취업률 등 수치로 대학을 평가하다 보니 학문의 다양성 저하나 특정 학문에 대한 편중이 심해졌다.
윤석열정부의 무전공(전공자율선택) 확대 정책은 불난 데 부채질하는 격이다. ‘융합형 인재양성’ 명분을 앞세워 돈으로 대학을 쥐고 흔든다. 15년간 등록금이 동결된 대학들 입장에선 정원의 30%가량을 무전공으로 뽑는 대신 받는 1조원의 유혹은 달콤하다. 학과 서열화와 인기 학과 쏠림은 불가항력이다.
AI가 인간을 대체할 것이라는 암울한 전망이 쏟아진다. 빅데이터에 인간의 감성과 공감을 불어넣는 건 인문학의 몫이다. 기초학문의 몰락은 국가 경쟁력 악화로 이어진다. 이대로 방치하는 건 국가의 직무유기다.
김기동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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