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윤의 하이쿠로 읽는 일본] [23] 과메기와 정어리에 기대어
소슬바람아
말린 정어리 등에
바다의 빛깔
木(こ)がらしや目刺(めざ)しにのこる海(うみ)のいろ
어제는 문득 과메기가 먹고 싶었다. 요즘처럼 아침저녁으로 으스스한 늦가을 바람이 등골에 스밀 무렵 생각나는 계절 음식이다. 꽁치를 바닷바람에 꾸덕꾸덕하게 말려서 한입 크기로 썰어 깻잎, 봄동, 쪽파, 청양고추, 마늘 등과 함께 쌈장에 싸 먹는다. 김이나 미역으로 싸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기도 한다. 갈색으로 윤기가 반드르르하게 도는 과메기는 차고 깨끗한 바람에 잘 말라 비린내가 전혀 나지 않았다. 각종 채소와 해조류 사이로 쫀득쫀득하게 존재감을 드러내는 생선 살을 음미하며 다가올 겨울에 감기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해달라고 빌었다. 면역력을 높이는 데는 제철 음식을 제때 잘 챙겨 먹는 일만큼 좋은 게 없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1892~1927)도 찬 바람 부니 생선 생각이 났는지 말린 정어리를 앞에 두고 이렇게 노래했다. ‘코’나 ‘라쇼몽’ 같은 고풍스러운 명작을 남긴 소설가인데, 하이쿠를 좋아해서 죽을 때 머리맡에도 다음과 같은 자작시를 놓고 떠났다. ‘콧물이 흘러 코끝에 은은하게 노을이 지네.’ 날이 갑자기 추워질 때 몸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감기에 걸려 콧물이 흐르고 코를 자꾸 풀다가 코끝이 붉어진다. 생애 최후의 한 수라고 하기에는 조금 우스꽝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코를 자꾸 풀어서 코끝에 노을이 진다는 발상이 아이처럼 귀엽고 순수하다. 나는 눈물이 나서 코를 풀 때마다 자꾸 이 시가 생각나 피식 웃음이 난다.
내가 소슬바람이라고 번역한 고가라시(木がらし)는 늦가을에서 초겨울에 부는 싸늘한 북서 계절풍을 뜻하는데, 일본어로 ‘나무’와 ‘시들어 마름’의 합성어다. 나뭇잎을 다 떨어뜨려 나무를 차고 마르게 한다는 거다. 입동 지나 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초목은 슬슬 생명의 불을 끄고 겨울을 준비한다. 그럴 때 말린 정어리를 꺼내 굽는다. 등에는 살아서 푸른 바다를 헤엄쳤을 때 밴 빛깔이 언뜻언뜻 비친다. 한 끼 식사를 위해 불 위에 지글지글 구워질 운명이지만, 정어리는 살아생전 자유롭게 활개 치던 드넓은 바다를 여전히 품고 있다. 윙윙 소슬한 바람이 불어대는 11월의 어느 날, 등푸른생선에서 바다의 빛깔을 보는 쓸쓸함 혹은 오묘함. 젓가락을 들고서 바다를 한 조각 입에 넣으면 고소한 생선 기름이 몸속으로 퍼지며 겨울을 맞이할 힘이 솟는다. 인간은 연약하고 생명은 추위를 꺼리니 이런 계절에는 더더욱 몸의 면역, 마음의 면역이 필요하다. 바다를 안고 밥상으로 올라온 물고기들에게 기대어 한 줌 힘을 얻으며, 부디 우리 모두 코끝에 노을 지는 일 없이 다가오는 겨울을 무사히 보내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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