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혁의 극적인 순간] 나는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오세혁 극작가·연출가 2024. 11. 13.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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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조선디자인랩·Midjourney

김동식 작가의 에세이 ‘무채색 삶이라고 생각했지만’(2024, 요다)을 기차에서 읽다가 울어버렸다. ‘쉬운 사람’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는데 눈물이 그야말로 ‘쏟아져 내렸다.’ 옆자리 승객에게 부끄러워서 한참을 통로 칸에 서 있었다. 다음과 같은 문장 때문이었다. ‘어릴 때는 솔직히 바보처럼 ‘당신을 위해 내가 손해 보지 않은 게 미안해요’란 자세가 있었다. 상대의 이익을 놓치게 만드는 걸 왜 미안해했을까? 상대가 이익을 놓치게 되더라도 그게 내 잘못은 아닌데.’(위의 책 109p)

최근 들어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이 한참 동안 계속되었다. 한동안 이유를 알 수 없어 두근거릴 때마다 메모를 했다. 한 달 넘게 메모를 하고 나니 원인이 명확해졌다. 사람 때문이었다. 나에게 불편한 부탁을 하거나 부당한 요구를 하거나 거절하기 어려운 호소를 하는 사람들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심장이 사정없이 두근거렸다. 터무니없는 계약 조건을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로 들이밀거나, 창작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이리저리 마음대로 수정해버리거나, 프로젝트를 함께 하자고 찾아와서 오랜 기간 도움을 받고는, 결국 자신들 위주로 판을 바꿔버리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사실 그들과 맞서면 이길 자신이 있다. 내가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잘못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나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모욕과 손해를 주었는지만 그대로 말해주면 된다.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 말이 그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을 못된 사람으로 만드느니, 차라리 내가 쉬운 사람이 되자고 결심한 지 꽤 오래되었다, 이 쓸데없는 결심 때문에 내 심장은 해가 갈수록 더 자주, 더 많이 두근거리고 있다. 사실 그들 정도가 주는 타격은 얼마든지 안고 살아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나 혼자 며칠 힘든 게 가장 효율적일 거라고 믿었다.

최근 들어 생각을 바꿨다. 꿈을 함께하는 동료들 때문이었다. 나 혼자만 참는다고 해서 나 혼자만 감당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내가 불편한 부탁을 하나 들어주려고 시간을 낭비하면, 내 동료와 함께 일하는 시간도 같이 낭비된다. 부당한 요구를 거절하지 못해서 하루 종일 말도 못하고 전전긍긍하고 있으면, 내 동료는 그런 나에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걱정되어 하루 종일 전전긍긍하고 있다. 판을 마음대로 바꿔버린 사람들에게 상처받아서 일주일 내내 집에서 멍하니 드러누워 있으면, 동료들과 함께 만들어나가는 꿈이 일주일간 멈춰버린다. 결국 내가 쉬운 사람이 되어버리면, 내가 사랑하는 동료들마저 쉬운 사람들이 되어버린다. 그 사실을 깨닫고 눈앞이 아찔했다. 평생 안 볼지도 모르는 사람들의 상처를 배려하느라, 평생 함께 걸어가기로 약속한 사람들에게 차곡차곡 상처를 건네준 느낌이었다.

더 이상 쉬운 사람이 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터무니없는 계약 조건을 들이민 이들에게는 그 조건이 왜 터무니없는지 긴 시간 동안 상세하게 말해주고 거절했다. 창작자의 의향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수정을 가한 이들에게는 정중하게 계약 해지를 제안했다. 우리의 도움을 받은 프로젝트에서 우리를 배제한 이들은 그냥 조용히 연락처를 차단했다. 더 크고, 더 높고, 더 멀리 갈 수 있는 프로젝트를 새롭게 만들어내겠다고 다짐하며. 그렇다고 내가 ‘쉬운 사람’을 완전히 포기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친구와 동료와 가족에게는 얼마든지 쉬운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들의 부탁은 얼마든지 불편함을 감수할 것이고, 그들의 요구는 어떻게든 반영할 것이며, 그들의 호소는 언제든지 귀를 기울일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얼마든지 불편한 시간을 감수하는, 너무나도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를 진짜로 불편하게 만드는 저 부당한 사람들에게, 나는 절대로 쉬운 사람이 되지 않을 것이다.

너무나도 쉬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 너무나도 어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이 결심을 하고 나니 다시 심장이 두근거린다. 이전의 불편한 두근거림과는 다른, 아주 기분 좋은 두근거림이다. (이 책을 ‘소행성 책쓰기 모임’에서 추천해주신 편성준·윤혜자 작가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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