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살 꼬맹이가 날 찾을텐데..." 온몸 암 번진 80대 경비원의 선택
“진단 받으면 그 녀석을 못 보는데… 그래서 그냥 일했습니다”
매일 출근해서 책임을 진다는 것… 진정 달콤한 삶은 무엇인가
마르고 수척한 고령의 남성이 응급실로 왔다. 병원을 오래 다녔던 것 같은 외양이었지만 기록은 전혀 없었다. 딸과 함께 온 그는 숨이 차다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자 그에게 땀내가 풍겨왔다. 최근에 증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 뭔가 이상해서 그에게 물었다.
“정말로 앓던 병이 없습니까?”
“병원에 안 다녔습니다. 다만, 배에서 뭔가 만져진 지는 한참 되었습니다.”
그의 배를 더듬었다. 단단하고 울퉁불퉁한 종괴가 만져졌다. 숨이 찬 증상과 연결해보면 최악의 진단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에게 재차 물었다.
“살이 빠지지 않았습니까?”
“최근에 살은 좀 많이 빠졌습니다.”
“이게 만져졌을 때 병원에 올 생각을 안 하셨습니까?”
“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조금 늦었는데, 계속 자랐습니다.”
나는 일단 검사를 해보겠다고 했다. 고집스럽게 병원에 오지 않아 치료 시기를 놓치는 환자는 종종 있었다. 몸에 자라는 딱딱한 종괴는 대부분 악성 종양이다. 몸 밖에서 만질 수 있는 정도면 이미 안에서 크게 자라고 난 뒤다. 벌써 마음이 불길했다.
잠시 뒤 확인한 그의 시티 영상은 끔찍했다. 마치 일부러 암을 키워온 것 같았다. 시작된 부위는 췌장인 것 같았지만 복강과 간, 폐로 퍼져 있었다. 그가 직접 만질 수 있는 것은 차라리 아주 일부였고, 폐로 번지고서야 호흡곤란이 온 것이다. 이 정도면 치료조차 무용했다. 그러나 설명하기가 괜히 망설여졌다.
“간과 폐에 나빠 보이는 종괴가 있습니다. 입원해서 검사받고 어떻게 치료할지 결정하겠습니다.”
짐작했다는 듯 그는 나에게 직접적으로 물었다.
“선생님, 하나만 묻겠습니다. 말기암 확률은 어느 정도인가요?”
“...솔직히, 다른 진단이 나올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입니다.”
주름진 눈가가 구겨졌다. 약간 눈물을 짓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나중에 입원해도, 가능할까요?”
“이 정도면 오히려 치료가 급하지는 않습니다.”
“여담입니다만, 오늘까지 경비 일을 하다 왔습니다. 오늘도 퇴근하고 온 겁니다. 직장에다가 일을 못하게 되었다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숨이 차지 않았습니까? 괜찮으셨습니까?”
“숨은 찼습니다.”
그는 말하는 중에도 숨을 몰아쉬었다. 지금까지 어떻게 일했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우리 단지에 다섯 살짜리 꼬맹이가 있습니다. 어찌나 총명하고 예의 바른지, 그 아이 보는 재미로 일했습니다. 제가 갑자기 사라지면 아이가 경비 아저씨를 찾을 겁니다. 인사를 하고 와야 합니다.”
“....”
“선생님. 솔직히 배에서 뭔가 만져지는 순간, 저도 암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제 나이가 팔십인데, 특별히 이걸 치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습니다. 그런데 진단을 받는 순간부터, 자식들이 저를 일하게 두지 않을 거고, 직장에서도 쉬라고 할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그냥 일했습니다.”
옆에서 그의 딸이 울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됐습니다. 지금부터는 쉬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세상을 떠나는 것이 아쉬워 보이지 않았다. 다만 다시는 출근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아쉬워 보였다.
“환자분, 삶이 있다면, 얼마든지 정리하셔도 괜찮습니다.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남은 시간이 있습니다. 다만 도움이 필요하시면 저희는 무엇이든 도와드릴 겁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천천히, 정리하고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자리로 돌아와 괜히 그의 암종을 열어 놓고 커서를 느리게 움직였다. 흔히들 일에서 해방된 달콤한 삶을 말한다. 하지만 우리네 삶은 그렇게 순순히 흘러가지 않는다. 적어도 경제적 여유는 행복과 동의어가 아니다. 시간에 맞춰 정든 장소에 출근하고, 아침마다 영특한 아이와 인사하며, 주민들을 안전하게 지키고, 매달 자녀에게 용돈을 건네는, 어떤 책임에서야 인간은 비로소 삶의 의미를 느낀다. 그가 마지막 퇴근이었음을 인지하는 순간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그는 나름대로 삶 자체를 완수하고 내 앞에 나타났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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