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 칼럼] 정치적 리더십의 요건
인재발탁 안목 부족하면 시스템 만들어 중용해야…도덕성·균형감각도 필요
박철규 대한민국지식중심 공동대표
최고의 리더십이 되겠다는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소원성취하면 꼭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쳐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 달라. 공이 있는 사람은 상을 주어 집으로 보내고, 능력 있는 사람은 편이 아니더라도 발탁해 달라했다.
흔히 정치적 리더십의 요건으로 도덕성, 가치와 철학, 균형감각, 비전과 전략 등등을 꼽는다. 그런데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과정과 최고 리더십들의 면면을 보면 무엇보다도 ‘나라를 경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한때 근대사를 배경으로 한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섭렵한 적이 있다. 그 중 지금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영화는 ‘왕과 나’와 ‘라스트 사무라이’이다.
통상 동서양의 양 편견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으로 대표된다. 이들 영화에는 진보된 서구적 가치와 낙후된 동양적 가치의 우열을 정하고 있다. 식민사관의 모태가 되는 동양정체론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사회진화론, 세계화, 문명의 출동과 습합(習合)이라는 개념으로 강대국들의 이해관계 관철을 정당화시키는 논리와 다르지 않다.
1950년대에 개봉된 ‘왕과 나’에서는 시암(태국)적 가치와 영국적 가치가 교호작용을 하게 되지만 결국 서구적 가치가 우월하다는 점을 드러내고 있다. 1990년대 리메이크 된 이 영화는 두 가치의 우열이 아니라, 상호인정과 존중으로 기조가 바뀐다. 이렇게 된 데에는 국가주의나 민족주의를 넘어,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려고 하는 세계사적인 흐름이 반영된 결과로 보인다.
‘라스트 사무라이’에서는 사무라이로 대표된 일본적 가치와 근대적 군대로 치장된 미국적 가치가 등장해 길항작용을 한다. 결국 동양적 가치를 중국이 아니라 일본으로, 서구적 가치는 미국적 가치로 치환한 것이다. 나아가 ‘사무라이’라는 기제로 치환된 일본적 가치가 면면부절하게 이어질 것이라는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시암은 최고의 리더십이 결심한 곳이다. 이와 같은 ‘능력과 안목’ 때문에 ‘제국의 시대’에 약소국인 이 나라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일본은 단순하게 보면 최고의 리더십이 능력자들을 존중, 발탁해 권한을 위임한 곳으로 볼 수 있다. 한국적 가치는 동양적 가치로 치환하는 것이 가능할까.
서세동점의 시기 서구열강을 비롯한 강대국은 약소국을 보다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식민사관을 만들어 전파해 왔다. 목적은 패배주의와 허무주의를 만연시켜 저항을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데 있었다. 이는 전간기(戰間期)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인지 최근 정치적 리더십과 지성 일부는 과거 식민지 지배를 옹호하고, 현재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를 대놓고 지지하는 발언이 잦다.
왜 그럴까. 민주주의의 요체가 차이를 인정하는 다양성에 있다고 강변하면 할 말이 없다. 어떻게 분식(粉飾) 하더라도 본질적으로 그들과 이해관계가 일치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런 부류는 자기의 이해관계를 마치 나라와 민족의 이해관계로 간주한다. 돈 중심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이해관계가 무엇인지는 삼척동자도 알 수 있다.
한국 근현대사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시작하게 되면 처음부터 의문에 봉착한다. 운요호 사건 이후 최초의 ‘불평등 조약’이라는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당시 일본의 전권대사인 구로다의 의도는 명백했다. 우리 대표는 이를 전혀 간파하지 못한 채 마치 도장 찍으러 온 사람인 양 행세했다. 이를 목도한 우리의 수행원들은 병조판서, 지금의 국방부장관의 태도에 얼마나 실망했을까.
일본 중국 한국이 약 15년 간격으로 문호를 개방한다. 그런데 일본은 자본주의가 잘 발달한 제국주의로, 중국은 반식민지로, 우리나라는 열강의 각축 끝에 식민지로 전락했다. 특히 ‘반만년의 찬란한 역사와 문화’를 가졌다는 우리나라가 왜 식민지로 전락했을까.
식민지로 전락한 가장 큰 이유는 정치적 리더십이 ‘나라 경영에 대한 무능력’ 때문이다. 무능한 정치적 리더십들이 권력을 잡았다면 ‘머리는 빌리면 된다’는 누구의 말처럼 능력자를 발탁해서 보완하면 된다. 다만 좀 모자라면 능력을 가진 인재를 발탁할 수 있는 ‘안목이나 시스템’이 반드시 필요하다.
무능한 리더십과 대중이 잘못 결합되면 어떤 결과를 야기시키는지는 당시나 지금의 현실에서도 잘 알 수 있다. 그 어떤 변명도 정치적 리더십의 책임을 면해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된다. 충실하게 의무를 다해 온 시민은 책임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울 수도 없다. ‘억압 있는 곳에 저항 있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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