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드릴, 베이비, 드릴’ 그리고 ‘먹사니즘’
트럼프가 취임 첫날 가장 먼저 서명할 행정명령 패키지에 파리기후협약 탈퇴가 포함된다고 한다. 오바마가 파리기후협약(2021년 발효)에 가입했다가 트럼프가 탈퇴한 뒤 바이든이 다시 가입했는데 돌아온 트럼프가 다시 탈퇴하는 것이다. 비단 이번만이 아니다. 선진국에 온실가스 감축 의무를 부과했던 교토의정서(2005년 발효) 역시 아버지 부시는 가입을 거부했다가 클린턴이 가입했으나 아들 부시가 탈퇴했다. 아버지 부시는 말했다. “어떤 경우라도 미국인의 생활방식은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트럼프 당선으로 미국, 나아가 전 세계의 기후위기 대응은 어떻게 되는 걸까. 후퇴한다는 게 정설이지만 현실은 좀 더 복잡하다. 트럼프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와 더불어 ‘드릴, 베이비, 드릴’(석유와 천연가스 추출 규제 완화)을 핵심 구호로 내세웠다. 높은 관세를 매겨 자국 생산을 육성하고 불법 이민자를 막아 그 이익이 노동자에게 돌아가도록 하는 한편 값싼 화석연료를 계속 사용해 경제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마가(MAGA)’가 지미 카터의 구호를 재활용한 것이듯 ‘드릴, 베이비, 드릴’도 2008년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세라 페일린의 구호였다. 당시 미국에서 셰일가스(퇴적암을 깨트리는 수압파쇄법으로 생산된 천연가스)가 나오자 환경파괴를 이유로 이를 저지하려는 민주당과 차별화하기 위한 주장이었다. 그러나 표를 의식한 오바마가 추출을 허용하면서 젊은 진보의 상징이던 그는 환경운동가들로부터 위선자라는 오명을 얻었다.
다행히 트럼프가 아무리 ‘드릴’을 외쳐도 유전개발, 특히 지하 생태계를 초토화하는 셰일가스 생산이 늘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많다. 이미 석유는 생산이 수요를 초과해 국제유가가 하락하는 마당이고, 셰일가스 역시 바이든 재임 기간에 꾸준히 증산했다고 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러시아로부터의 천연가스 수급이 어려워지면서 미국산 가스를 유럽에 팔겠다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블룸버그, 포브스 같은 경제매체들에 따르면 이미 재생에너지로 선회한 유럽에서 미국산 가스에 대한 수요는 생각만큼 늘지 않았다. 결국 트럼프의 ‘드릴’ 정책은 생산 확대보다 화석연료 사용 확대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정작 ‘드릴, 베이비, 드릴’의 현장은 한국이다. 미국의 거대 화석연료 기업들은 파리기후협약은 무시하더라도 시장 논리는 철저히 따른다. 그러나 국가가 에너지 생산을 담당하는 우리는 정파에 따라, 대통령의 취향에 따라 에너지 정책이 바뀐다. 박정희 시절처럼 동해에서 유전을 개발한다고 했을 때 이미 실패한 광구인 데다 그 용역기관의 미국 본사가 가정집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지만 정부가 위험부담을 떠안고 다섯 공에 5000억원이 들어가는 시추작업을 시작한다.
더 실망스러운 소식도 들려왔다. 정부가 제출한 내년 원전 관련 예산 2139억원이 12일 국회 산업통상자원위를 통과했다. 문재인 정부의 탈원전 정책에 따라 올해 원전 예산을 전액 삭감했던 더불어민주당이 입장을 바꿨다는 뜻이다. 아마 이재명 대표의 ‘먹사니즘’과 관련이 있을 텐데 가뜩이나 국민의힘과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생각에 더욱 확신을 준다. 최근 민주당이 금융투자소득세 과세를 유예한 데서 이미 전조가 보였다. 더불어민주당도 미국 민주당처럼 입으로만 진보적 가치를 말하는 고소득 명망가 엘리트의 길을 가는 걸까.
세계 정치가 점점 나빠지는 만큼 기후도 점점 나빠진다. 유럽연합 코페르니쿠스기후변화국은 2024년이 기상 관측 이래 가장 더운 해이며 기후변곡점인 1.5도를 넘는 첫해가 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20년간 1.5도를 넘어야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므로 아직 유엔기후협약에서 확인한 희망을 버리지 말자고도 했다. 다급해진 과학자들이 ‘생태계의 심장마비’를 거론하는 가운데 현재 아제르바이잔에서 열리는 COP29에서는 ‘손실과 피해 기금’ 조성을 논의하고 있다. 물론 최대 수혜자인 미국은 빠진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은 국가나 국제사회가 기후위기를 완화하기는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보수, 진보 어느 당이 잡아도 마찬가지다. 모든 현대국가는 성장국가이며 생태국가, 녹색국가는 이상향으로만 존재한다. 그나마 할 수 있는 일은 기후와 인프라가 다른 지역마다 각자 재난에 대응하는 일이다. 최근 스페인 남동부에서 일어난 대규모 기후재난을 보더라도 미리 주민들에게 경보를 발령했으면 피해를 줄였을 것이다. 세계지도자나 국가지도자보다 지역지도자가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다.
한윤정 전환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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