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과 언어 학습 [로버트 파우저, 사회의 언어]

한겨레 2024. 11. 13. 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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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9일(현지시각)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서 방문객들이 노벨 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을 읽고 있다. 장예지 기자 penj@hani.co.kr

로버트 파우저 | 언어학자

2024년 10월10일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선정 순간을 평생 잊을 수 없겠다. 이미 몇년 전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는 읽었는데, 읽지 않고 미뤄둔 ‘희랍어 시간’을 꺼내 읽었다. 문학 작품에서는 찾기 어려운 언어 학습에 관해 깊이 파고 들어가는 내용이라 흥미진진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남편과 이혼한 뒤 아들의 양육권을 갖는 데도 실패한 주인공은 갑자기 말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는 다시 말을 하기 위해 고전 희랍어를 배우기 시작한다. 희랍어 박사인 강사는 점점 시력을 잃어가는 중이다. 독일에서 오래 살았던 그는 한국 생활에 아직 익숙하지 않았고 시력이 상실되어 가는 것을 덮으려고 노력한다. 이름이 없는 두 주인공은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소통하며 고통을 나누게 된다.

‘희랍어 시간’은 언어 학습을 둘러싼 두개의 화두를 다룬다. 첫째는 모어다. 20세기 후반 발달한 언어학 이론의 핵심은 원어민의 완벽함이었다. 원어민의 능력과 직관의 역할을 강조한 노엄 촘스키의 변형생성문법 이론이 특히 그랬다. 이는 외국어 교육에도 영향을 미쳐 학습자가 지향해야 할 목표는 ‘원어민과 같은 수준’이라는 인식의 정착으로 이어졌다. 이 논리에 따라 대상 언어를 모어로 사용하는 원어민은 완벽하고 그렇지 않은 이들은 늘 부족하다는 인식이 형성되었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이런 논리를 뒤집는다. 여자 주인공에게는 모어가 오히려 불안하다. 자신과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고전 언어가 오히려 편안하다. 심지어 정신적인 피난처 역할도 한다. 남자 주인공은 독일에 살 때 문화적으로 동화하려고 노력하면서 모어인 한국어를 불편하게 여기지만, 아시아계 유학생으로 소외당하고 독일어에서도 불편함을 느낀다. 그는 고전 언어에 몰두하면서 일종의 탈출구를 찾으려 했다.

두번째는 외국어 학습과 교수 방법이다. 고전 희랍어는 이른바 ‘죽은 언어’이기 때문에 말하기와 듣기를 배우지 않아도 된다. 수업은 주요한 텍스트에서 사례를 뽑고 문법과 단어 설명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고전어 학습 방법은 이미 18세기부터 일반 외국어에도 적용해왔다. 19세기 말부터 외국어 교육을 말하기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한 여러 시도가 이어졌지만 문법과 독해 중심 외국어 교육은 20세기 말까지 이어졌다. 1980년대 무렵부터 양상이 달라졌다. 영국에서 시작한 의사소통 중심 교수법의 유행으로 문법과 독해 중심 외국어 교육이 지루하고 효과가 없다고 비판을 받기 시작했고, 이후 점차 문법과 독해 교육은 외면받았다.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이런 경향과는 완전히 반대다. 꼼꼼한 문법 설명과 사례를 좋아하고 지적 자극을 받는다. 두 주인공이 서로 다른 입장에서 언어의 깊은 구조적 부분에 빠지는 것 역시 그들에게는 일종의 피난처라 할 수 있다.

그들에게 고전 희랍어가 피난처가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한국 사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회에는 언어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주류 사회가 있다. 드러나기도 하고 감춰지기도 하지만 언어 통치를 통해 한 사회에서 주류의 위치를 지속하려는 이들의 존재는 분명하다. 이러한 사회적 통치를 부인하고 개인으로서의 주체성 확보를 위해 정신적인 피난처를 찾는 이들이 생기게 마련이다. 피난처는 다양한데, 소설 속 주인공들이 선택한 것은 언어 학습이었다.

이들만 그런 건 아니다. 언어 학습은 주류 사회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피난처를 찾는 이들에게 꽤 유용한 선택지였다. 주인공들처럼 고전어를 배우려는 이들도, 남들이 잘 모르는 언어를 공부하는 이들도 있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원어민을 초월하는 이른바 ‘언어 천재’도 심심찮게 등장했다. 언어 학습의 세계로 피난을 떠나 홀로 해방을 경험하는 이들도 있지만 다른 사람들과 같이 배우면서 가상의 피난 공동체의 소속감을 만끽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걸로 된 걸까. 주류 사회의 언어적 통치 아래 온전한 해방을 이루는 게 가능할까.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축하하며 상대적으로 덜 주목을 받은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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