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나무농장에서 만난 사람들 [똑똑! 한국사회]
원혜덕 | 평화나무농장 농부
며칠 전에 생강을 캤다. 올해의 마지막 작물을 거두고 있노라니 한 해가 끝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계절이 지나가는 것은 누구나 느끼겠지만 작물을 심고 거두는 농부는 더 뚜렷하게 받아들인다. 한 해를 돌아보면 농사를 짓고 사는 우리에게 농사일이 일상의 중심이 된 것은 당연하다. 거름을 만들고 시절에 따라 밭에 내서 갈아 작물을 심고 수확했다.
이 농사와 함께 우리 농장에는 또 하나 돌아가는 축이 있다. 사람들의 방문이다. 처음에 농지를 사들이고 집을 지을 때 거실을 크게 만들었다. 여러 사람과 며칠 같이 자면서 농사 공부를 하려고 했다. 지내다 보니 공간이 부족해서 집 바로 옆에 건물을 하나 지었다. 비용을 절약하느라 남편과 내가 직접 짓다 보니 간단하고 허술한 집이 되었지만 수십명이 여러날 함께 지낼 수는 있게 되었다. 우리 집 바로 옆에 지어서 내가 ‘옆집’이라고 불렀다. 시간이 지나자 농사와 관련이 없는 분들도 농장을 방문하고 싶어 했다. 우리 농장의 일상을 함께 느끼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찾아온다.
올해 다녀간 두 팀을 특별히 기억한다. 지난 4월에 다녀간 ‘흥부기행단’과 바로 지난주에 다녀간 ‘시민언론 민들레’다. 두 팀 다 농장에 와서 하룻밤 자고 갔다.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분들이었다. 그분들의 생각과 활동에 동의하는 마음이 있었기에 기꺼이 주무시고 가라고 했다. 불편한 잠자리를 염려했지만 다들 그런 건 괜찮다고 했다. 우리도 많은 사람을 맞으려면 할 일이 많다. 인원수대로 침구도 전부 세탁해놓아야 하고 농장 전체를 얼추라도 정리하고 청소해놓아야 한다.
흥부기행단은 1년에 한번씩 이 시대의 흥부 정신을 가진 사람과 아름다운 산하를 찾아가는 모임이라고 했다. 20년간 이어왔다고 한다. 환경재해를 비롯해 평화의 위기, 경제적 양극화 등이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지금, 흥부의 이타주의가 세상을 살릴 것이라고 믿고 ‘이기’가 아닌 ‘이타’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꿈을 꾸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이 모임을 만들고 이끌어가는 분은 김대중 대통령 때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던 분으로, 내가 한겨레에 한달에 한번씩 쓰는 글을 보고 우리 농장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찾아온 날 밤에 어떻게 ‘흥부 법칙’을 정립하고 실천해 나갈 것인가를 밤늦도록 토론하며 진지한 분위기를 잃지 않던 그분들의 모습이 지금도 남아있다.
또 다른 하나는 시민언론 민들레다.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한 대안언론을 지향하는 분들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한달여 전에 시민이 후원하는 이 언론의 고문을 맡은 분이 전화를 했다. 에스엔에스(SNS)에서 알게 되었고 촛불집회에서 만나 가까워진 분이다. 시민언론 민들레가 출범 2주년을 맞아 워크숍을 가지려고 하는데 우리 농장에서 열고 싶다고 했다. 나는 11월이 되면 가을걷이도 끝나서 농장이 쓸쓸하고 추울 것이라고 했다.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오라고 할 생각이긴 했다. 그분은 농장 풍경이 황량한들 무어가 문제냐고, 의미 있는 곳에서 2주년 모임을 갖고 싶다고 했다. 그 말이 마음에 들어왔다. 단합대회도 겸해서 저녁에 바깥에서 모임을 갖고 싶다고 해서 남편이 불을 피울 수 있는 드럼통을 마련하고 장작도 넉넉하게 준비해 쌓아놓았다.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을 가운데 두고 이야기를 나누고 노래도 부르는 모습은 추운 밤 기온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이분들을 맞기 전에는 농사를 알지 못하는 분들이 우리 농장에 와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농장을 돌아보고 소박한 식사 대접을 받은 이분들이 농장에서 하룻밤을 지낸 것만으로도 즐겁고 의미가 있었다고 한다. 수고한 우리를 기쁘게 해주려는 말이기도 하지만 진심이 담겨 있음은 알 수 있다. 그분들을 맞는 일이 세상과 싸우는 그분들에게 작은 위로와 평안을 준다고 생각하면 기쁘다. 세상을 바꾸고 싶어 하는 분들과의 만남은 우리에게도 힘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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