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2.0, 윤 대통령 ‘가치 외교’가 설 자리는 없다 [박현 칼럼]
박현 | 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정부효율부’ 수장으로 발탁된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는 트럼프의 대선 압승에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트럼프 재선을 위해 1억2천만달러를 기부하고 자신이 소유한 엑스(X)를 트럼프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운동의 플랫폼으로 활용했다. 머스크는 대선 이틀 뒤인 7일 엑스에 트럼프 마러라고 자택에서 두 손을 번쩍 든 아들을 무동 태운 채 트럼프와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사진 위에는 ‘노부스 오르도 세클로룸’(Novus Ordo Seclorum)이라는 글귀를 남겼다. 라틴어로 ‘세기의 신질서’ 탄생을 뜻하는 이 글귀는 1776년 독립선언을 기념해 미국 달러에 새겨져 있다. 머스크가 트럼프 압승을 마치 독립혁명이 성공한 것처럼 기성 질서의 근본적인 전환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마가는 선거 슬로건에 그치는 게 아니다. 국내적으로는 1960년대 흑인·소수자 등 민권운동의 결과로 얻어낸 민권시대 이전으로 미국을 되돌리려는 백인·복음주의 세력의 반동이다. 이번 선거에서 고물가 장기화에 지친 흑인·중남미계 노동자 일부가 트럼프 지지로 돌아서긴 했지만 핵심 지지층은 저소득·저학력 백인과 복음주의 개신교 신자들이다. 트럼프는 세계화 여파로 인한 일자리 감소와 양극화 심화, 그리고 이민자 급증으로 지위가 흔들린 이들 계층의 불안과 분노를 대변했다. 그는 모든 게 부패한 지배 엘리트들의 자유무역 정책과 ‘세계 경찰’ 역할 탓이라며, 그들의 분노를 엘리트들과 ‘외부자들’(유색인종, 불법 이민자, 무슬림 등)에게 향하도록 선동했다. 마가 운동은 극우 포퓰리즘적 백인인종주의에 기반한 것이다.
트럼프와 같은 극우 포퓰리스트가 최강대국 정부를 장악한 것은 근현대 세계사에서 처음이다. 그의 재선은 2016년 당선이 일회적 현상이 아니라 미국 사회 저변에 흐르는 도도한 물결을 반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래서 미국뿐만 아니라 기존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심대한 파열음을 낼 것이 틀림없다. 그는 탈냉전 이후 세계화·개입주의를 핵심으로 한 역대 대통령들의 자유주의적 패권 전략이 미국 국력을 쇠퇴시켰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중국을 세계무역기구(WTO) 체제에 받아들여 미국 주도 질서에 편입시키고자 했으나 공산당 지배 체제를 바꾸기는커녕 오히려 미국에 대규모 무역적자를 초래하고 일자리를 잃게 했다고 말한다. 또 잦은 외국 분쟁 개입은 재정 낭비와 군사력 약화를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전세계에 전파하려는 주류 외교안보 그룹을 ‘전쟁광’ ‘내부의 적’으로 규정하는 게 이런 이유에서다.
마가의 대외정책은 ‘미국 우선주의’와 ‘힘을 통한 평화’라는 슬로건으로 압축된다. 그 요체는 보호무역과 외국의 분쟁 개입 축소다. 그렇다고 완전한 고립주의로 간다는 의미는 아니다. 외국 분쟁 개입을 최소화하되, 동맹국의 자체 방위 부담을 늘리고 미국은 핵심적 이익이 침해받을 때만 개입한다는 내용이다. 대신에 압도적인 군사력을 통해 적들이 오판을 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트럼프가 13일 국방장관에 강경파 군인 출신을 지명하면서 “그가 키를 잡고 있는 한 미국의 적들은 ‘우리 군대는 다시 위대해질 것이며, 미국은 결코 물러서지 않는다’는 경고장을 받은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런 의도로 해석된다. 소모적인 외국 분쟁에 끌려들어가는 대신 미국 경제 부흥에 주력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의 예측불허성은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자산이다. 온갖 엄포와 협박을 동원한 협상 카드들을 내보이며 상대방을 공포와 충격에 빠뜨린 뒤 잇속을 챙기는 스타일이다. 뉴욕 부동산 거래에서 단련된 수법을 1기 때도 써먹어 ‘벌거벗은 거래 외교’로 불린다. 트럼프는 정부 요직에 충성파들을 속속 지명하고 있고, 의회·사법부의 견제도 기대하기 어렵다. 트럼피즘 2.0이 몰고 올 파장을 가늠하긴 쉽지 않지만, 분명한 건 자유주의 진영의 결속을 통해 권위주의 체제를 압박하는 바이든식 ‘가치 외교’는 트럼프의 사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트럼프는 벌써 우크라이나 전쟁 종결을 위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도 ‘거래’를 할 태세다.
윤석열 대통령은 미·일 편향적 ‘가치 외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런 접근법으로는 트럼프를 상대하기 어렵다. 중·러와 관계 개선을 해 외교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 북한과 대화의 문을 다시 열어야 한다. 마가는 외국 개입 축소를 지향하고 있는 만큼 한반도 해빙과 맥이 통한다. 트럼프가 1기 때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대화를 한 이유이며, 지금도 그 가능성은 열려 있다. 남북이 서로 원수처럼 지내는 지금 상태에서 북-미 대화가 재개될 때 우리가 설 자리는 없다. 세상이 바뀌었다는 점을 윤 대통령이 하루빨리 깨닫고 능동적으로 나서길 바란다.
hy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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