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나아갈 거예요”…감독 그레타 거윅의 야심을 질투하다

한겨레 2024. 11. 13.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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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9회
영화 ‘바비’ 촬영 현장의 그레타 거윅 감독. 워너 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어릴 적부터 나는 친구들의 미래를 상상하곤 했다. 이 친구는 이과에 갈 것 같아. 저 친구는 체육 선수가 되지 않을까. 이 친구는 예술가가 될 거야. 어쩐지 그것은 대체로 잘 맞아서 나는 은근히 나의 예지를 믿기 시작했는데 성인이 된 뒤에도 내 것만큼은 캄캄했다. 내 앞은 당장 내일도,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아마 나는 단명할 운명이 아닐까 그런 이상한 생각도 했다. 하지만 서른하고도 몇 년간 나는 살아있고, 여전히 앞날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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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뭔지는 몰라도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은 했다. 유아시절에는 내가 요술 지팡이를 휘둘러 금빛 별가루를 흩뿌리면, 모두가 그걸 감탄하면서 보는 상상을 했다. 너무 구체적으로 상상해 반생을 산 지금도 그 장면이 생생히 떠오를 정도로.

그런 내게 누구를 가장 질투하느냐 묻는다면, 할리우드 여성 감독 사상 최고의 흥행을 기록한 그레타 거윅을 꼽을 것 같다. 그에게서 질투할 점을 찾으라면 지면이 넘치도록 나열할 수 있다.

영화 ‘작은 아씨들’의 오르골 보석함을 연 듯 영롱한 순간들, ‘레이디 버드’에서 좌충우돌하던 사춘기 시절의 코끝 시린 감각, ‘프란시스 하’에서 뉴욕 거리를 가로지르며 춤을 추는 신체의 생동감, 전세계의 핑크색 페인트를 동내며 워너브라더스 역사상 최고로 흥행한 영화 ‘바비’의 성적, 거대한 원작을 바탕으로 한 차기작 ‘나니아 연대기’,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라는 커리어까지. 독립 영화 배우로 시작해 할리우드 여성 감독으로서 아직 누구도 가보지 못한 자리로 성큼성큼 전진하고 있는 그레타 거윅 말이다.

그레타 거윅 감독. 코스모폴리탄 제공

그레타 거윅이 영화 ‘바비’ 홍보 차 서울을 찾았을 때 그레타 거윅을 독점 인터뷰할 기회를 얻었다. 하고 싶은 질문이 너무 많았지만 그를 보자마자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I Love you!!!”(당신을 사랑해요!)부터 외쳤다. 그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나를 꼭 안아줬다. 우리는 영화 ‘바비’와 여성성과 젠더, 창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오래 참지 못하고 정말 하고 싶었던 질문도 꺼내 들었다. 젊은 나이에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까지 간 창작자로서 당신이 나아가고 싶은 가장 먼 곳은 어디냐고.

“앞으로 제게 남은 시간 동안 시도해보고 싶은 작품이 정말 많아요. 하지만 각각의 작품은 아이템 단계부터 개봉하기까지 약 3-4년은 걸려요. 그러니 남은 삶 동안 제가 만들고 싶은 모든 영화를 제작할 순 없는 거예요. 또한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당연하게 주어지는 것도 아니죠. 그렇기에 매분 매초마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결국엔 하지 못하는 거예요. 영화란 매일매일, 그리고 몇 년이 걸리는 시간의 예술이기 때문이죠. 마치 매달 마감 기한이 있는 잡지사에서 일하는 것과 비슷해요.”

그레타 거윅은 마치 누군가 이런 질문을 하길 기다렸다는 듯, 이 모든 말을 아주 빠르게 말했다.

“제가 창작자로서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남은 시간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앞으로 대략 20년 정도겠죠? (그는 마흔한 살이다) 그렇기에 저는 쉬지 않을 거예요. 계속해서 만들고, 나아갈 거예요. 그게 제가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겠지요.”

영화 ‘작은 아씨들’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엠마 왓슨, 시얼샤 로넌, 플로렌스 퓨. 소니픽처스 코리아 제공

그레타 거윅의 말 중 가장 자극받은 것은 하고 싶은 영화를 모두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원하는 걸 한 편이라도 더 만들기 위해선 매분 매초 투구해야 한다고 한 계산법이다. 앞으로 그 자신이 현장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20년으로 내다봤을 때 한 영화당 3∼4년의 시간이 걸린다. 그렇게 계산하면 (쉬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그에겐 약 7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시간이 남은 것.

그렇게 생각하자, 나는 조급해졌다. 내게는 내가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세월이 얼마나 남은 거지? 20년? 30년? 앞으로 나는 몇 권의 책을, 몇 번의 프로젝트를 더 만들 수 있을까? 몇 개의 글과 몇 개의 화보를 생산할 수 있을까? 그것들 중 어떤 것이 휘발되어 사라지고 어떤 것이 남을까?

한 세기도 채 살지 못하는 것이 사람의 인생. 아무리 건강하고 왕성한 창작자도 한 세기면 스러져 고요해진다. 몇 개의 영화, 십여권의 책, 수십 수백 개의 곡 등등을 남기고. 세월이 유한하다는 걸, 그 세월 안에 내가 해 둘 수 있는 일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해 차곡차곡 개켜 놓아야 한다는 걸, 우리는 쉽게 잊는다. 소파에 엎드려 릴스와 쇼츠를 넘기며, 언젠가 내가 바라는 걸 한 순간이 올 거라고, 언젠가 그것을 할 진짜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고, 지금을 뭉개면서, 흐리면서, 결국 잊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 달려온 지금, 내게 남은 시간은 얼마인가?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그 멋진 작품들을 이미 쌓아 놓은, 그리고 한창 젊은 그레타 거윅도 남은 세월과 싸우고 있는데, 그렇다면 나는? 그 후부터 나는 내가 지금 몇 년동안 살아왔는지보다 내게 앞으로 남은 시간을 뒤에서부터 헤아리기 시작했다. 내가 현장에서 뛰어다니며 일할 수 있는 10년, 혼자 작업해야 할 10년, 은퇴해야 할 10년….

영화 ‘레이디 버드’ 촬영 현장에서 그레타 거윅 감독과 시얼샤 로넌, 로리 멧칼프.

그리고 인간으로서, 창작자로서 그가 믿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전 불확실성, 그리고 아직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을 깊게 믿고 있어요. 알 수 없는 것, 확신할 수 없는 것은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백지장처럼 불안하죠. 우리는 늘 누군가가 우리에게 어디로 가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길 바라니까요. 하지만 저는 이야기를 만드는 감독이자 창작자, 그리고 불확실한 인생을 앞에 둔 한 인간으로서 이런 상태에서 흥미로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3-4년간 하나의 프로젝트를 마치고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오, 다시 그 불확실성을 마주해야겠군’이라 생각하죠. 끝나면 또다시 새로운 불확실성이 여전히 제 앞에 도사리고 있어요. 불안하지만 저는 거기에 새롭고 흥미롭고 어떻게 튈지 모르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나아갈 수 있어요.”

눈앞이 캄캄하고 도무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공무원도 아니고 회사원도 아니고 예술가도 못되고 아무래도 단명할 운명일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보이지 않음을, 알 수 없음을, 불확실성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다. 내가 캄캄하다 표현한 그것을 하얀 백지장이라 말하면서. 그레타 거윅과의 짧은 대화에서 나는 용기를 얻었다. 그와 인터뷰 후 수동으로 감는 손목시계를 샀다. 내게 남아있는 시간을 보기 위해서, 매분 매초를 보기 위해서, 바로 지금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이제 나는 새로운 백지장을 채워 나갈 준비가 됐다.

▶‘그레타 거윅이 나아갈 가장 먼 곳’ 인터뷰 보러가기 (클릭!)

‘이예지의 질투는 나의 힘’은?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을 질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부러운 점을 찾아내고야 마는 것이 그의 오랜 습관이지요. 이예지 디렉터가 <GQ>, <아레나>, <씨네21> 등 4개 매체를 거치며 지금껏 만난 사람들의 면면 중에 가장 열렬히 질투했던 구석을 파고든 이야기로 찾아옵니다. ‘질투는 나의 힘'은 격주 수요일 낮 12시에 만날 수 있습니다.

이예지 <코스모폴리탄> 피처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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