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산을 닮는다' 주민들처럼 반듯, 호방한 산 [경상도의 숨은 명산 월아산]
가을 바람은 나그네 마음을 설레게 한다. 누구나 가을에 사랑할 수 있다는 말은 통속적임을 느끼면서 발길을 옮긴다. 이삭여뀌, 개여뀌. 고들빼기, 취나물, 배암차즈기, 오리방풀. 이들은 모두 가을꽃, 빨강, 노랑, 흰빛, 보랏빛 정겨운 우리 꽃이다.
아침 9시경 청곡사 주차장에는 여유가 있다. 공휴일이지만 생각보다 탐방객들이 많지 않다. 가을의 쓸쓸함이 몰려오는데 발밑에는 도토리가 구른다. 돌길 오르막, 소나무 아래 여기저기 쌓아둔 돌무더기 운치를 더한다.
월아산月牙山은 해발 482m, 경남 진주시 동쪽 금산·문산·진성에 걸쳐 있는 진주의 명산이다. 높은 산은 아니지만 장군대봉, 국사봉 사이 질매(질매는 소 등에 짐을 실으려고 얹는 안장, 길마(질마)의 사투리다)재로 떠오르는 달이 볼 만하다. 산이 달을 토하는 듯해서 아산토월牙山吐月, 달엄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접근성이 좋고 산길이 잘돼 있어 위험한 구간이 없다. 가족·연인끼리, 초보자도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등산객이 많아 안전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하기 좋은 곳이다. 청곡사 주차장에서 정상 장군대봉을 거쳐 되돌아오는 데 대략 5km, 3시간 정도 걸린다.
진주성 버금가는 우국충정의 산
9시 30분, 정자 있는 능선 안부(장군대봉 정상 1.3·청곡사 0.8·두방사 1km)에서 잠시 숨을 돌린다. 오른쪽 두방사, 일행은 왼쪽으로 올라가는데 길섶으로 연녹색 차나무 잎을 씹으니 알싸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아직도 여름을 보내기 싫은 듯 하얀 꽃을 피웠다. 노각나무와 같은 식구이니 꽃 모양도 비슷한데 차나무꽃은 훨씬 작다. 소나무 그늘 밑에 마삭줄이 빼곡하게 자란다.
가는쑥·기린초·개족도리·까치수염·사초를 바라보며 9시45분 성은암 갈림길(성은암 1.1·정상 1.1·청곡사 1km). 다른 지역보다 이 산의 소나무는 색다른 멋이 있다. 길고 매촐하게 뻗쳐올라 꼭대기는 아래쪽으로 처졌다. 자만이 넘치거나 건방지지 않고 고개 숙여 겸손한 자태가 좋다. 나무도 그 지방의 기질을 닮는다. 진주를 비롯한 서부 경남 사람들은 예의범절이 바르고 정숙한 듯하면서도 호방하고 그릇이 크다.
산 아래 남해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 질주 소리, 마삭줄 옆에 춘란이 듬성듬성 자라고 삽주·애기나리, 콩잎처럼 작은 잎을 달고 있는 것은 토종 칡이다. 잎만 남은 초롱 꽃대, 보라색 꽃 배암차즈기, 노란 꽃이 환한 고들빼기, 바윗돌에 흙과 낙엽이 덮였는데 마삭줄이 군락을 이루었고, 그 위로 소나무가 바람막이처럼 섰다. 숲속에서 서로 어울려 사는 자연의 다양성을 본다.
통나무 의자 쉼터(장군대봉 0.3·청곡사 2.1·소정상 1.0km), 곧바로 헬기장 터를 지나 10시 15분. 482m 월아산 정상(청곡사 2.3·질매재 2.1·두방사 0.9km)에 닿는다. 속옷만 젖을 정도로 쉬엄쉬엄 올라왔다. 정상은 넓고 전망이 빼어났다. 방송 송신탑, 운동시설, 정자, 데크, 나무 의자, 감시초소, 저 멀리 남해안, 진주시가지, 남해고속도로, 나무 사이 남강, 도시 근교에 있으면서 험준한 산이 아니다 보니 사람들이 많다. 왼쪽부터 통영 거류산(571m)·벽방산(651m), 고성 연화산(524m), 사량도 지리산(399m), 멀리 고흥 팔영산(606m), 광양 백운산(1,223m)을 비롯한 수많은 산. 진주시가지는 오른쪽 발밑에 있다. 산 아래 금호지에서 바라보는 월출은 절경으로 알려졌다.
가을꽃과 도발적인 여뀌의 붉은빛
월아산은 충장공 김덕령 장군이 임진왜란 때 이곳에 목책 성을 쌓아 군영으로 삼고 왜적을 토벌했다. 청곡사 주차장 한편에 비석이 있다. 김덕령 장군(1567~1596)은 광주 출생, 의병장 곽재우 장군과 친분이 깊었고, 각지에서 왜군을 토벌해 명성을 떨쳤지만, 이몽학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로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죽었다. 월아산은 진주성과 함께 우국충정의 상징이다. 동쪽은 비봉飛鳳, 서쪽은 천마天馬 형국이라 동쪽은 정승, 서쪽에는 장군이 나오는 곳이라 한다.
물 마시고 단감 한 입, 10시 35분쯤 내려간다. 헬기장 터 지나 소정상 갈림길(장군대봉 0.3·청곡사 2.1·소정상 1.0km)에서 소정상으로 간다. 짙은 녹색 숲에 유난히 희고 환하게 핀 취나물 꽃, 보랏빛 오리방풀·배암차즈기꽃, 붉은 여뀌, 노란 고들빼기꽃, 이들은 모두 가을꽃, 가을의 화신花神이다.
10시 50분, 호젓한 편백 숲길이 좋다. 편백나무는 산벚·굴참·소나무와 섞여 있지만 돌무더기, 바위와 어우러져 이 길을 걸으면 마음이 순화될 것 같아 기분 좋은 길이다. 월아산은 큰 부담 없이 오를 수 있어 좋다. 능선길에서 만나는 차나무, 군데군데 돌무더기, 건방지지 않은 소나무와 온갖 야생화들.
편백나무 갈림길 지점(장군대봉 0.6·청곡사 2.0·성은암 0.5km)에서 청곡사 방향으로 간다. 돌무더기 산길에 두 개의 돌탑 사이를 지나 돌탑 갈림길(장군대봉 1.0·청곡사 1.5·질매재 0.6km)에서 청곡사로 내려간다. 이 산중에서 유곽의 기생을 만난 듯 붉은 자태가 도발적이다. 산길에 보라는 듯 고개 들어 핀 이삭여뀌와 개여뀌. 작은 꽃이 줄줄이 엮여서 여뀌, 붉은 꽃 매운맛이 귀신을 어지럽게 하거나 쫓는다는 역귀逆鬼에서 여뀌가 됐다. 매운맛이 있어서 생선요리에 좋고 물에 찧어 놓으면 물고기를 천천히 움직여 잡을 수 있다고 했다.
11시 5분 돌무더기, 바위 지대 쉼터. 돌탑 옆에 비석 같은 검은 돌에 새긴 시비가 특이하다. 상수리·고욤·감태나무 아래로 걷는데 까마귀는 까치처럼 울고산 아래 개 짖는 소리, 새소리, 목탁 소리까지 섞여서 들린다.
11시 15분 성은암 갈림길(성은암 0.3·장군대봉 2.0·청곡사소류지 0.6km) 지나 소나무 내리막길에서 만나는 병꽃·난티·개암·청미래덩굴·작살·노간주·소나무. 10분쯤 더 내려가서 이정표 없는 갈림길, 왼쪽으로 청곡사 길이라 직감하고 방향 틀어 내려간다. 지루할 정도로 멀게 느껴진다. 여기저기 재선충 피해 소나무 무덤들.
천년고찰 청곡사와 신덕왕후
11시 반경 나무 아래로 청곡사 절집이 보인다. 이곳에는 상수리나무 껍질이 굴참나무처럼 두껍다. 진주 지역국립대학에서 붙여놓은 나무 이름표가 인상적이다.
청곡사 늪지(주차장 0.1·성은암·소정상 0.6·정상 2.6km)까지 내려오니 11시 45분, 햇볕이 따갑고 취임 행사를 하는지 사람들이 많다. 청곡사 마당의 배롱나무꽃은 붉은빛이 바랬고 절집의 보살처럼 빨간 꽃무릇은 절정이다. 청곡사는 주변 산세가 아름다워 청학이 날아와 앉은 자리라 한다. 신라 헌강왕 때 도선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고려 말 왜구 토벌 후 이성계가 청곡사를 찾았다. 우물가에 물 긷는 여인에게 물을 얻어 마시는데 버들잎이 띄워 있었다. '체할 수 있으니 천천히 마시라'는 배려였다. 그 마음씨에 반해 훗날 왕비로 맞았는데 신덕왕후다.
정오 무렵 주차장으로 돌아오니 흐렸던 날씨는 햇볕이 쨍쨍하다. 진주 시내를 달려간다. 남강교 아래는 형형색색. 개천 예술제를 준비하는지 강물에 유등이 떴고, 진주성 광장에는 공사 반대 현수막이 걸려 주변이 어수선하다. 근처 식당에서 다슬기 수제비에 한잔 기울인다. 한때 진주 골목 누비던 고학 시절은 이제 추억이 되었다.
산행길잡이
청곡사 주차장(등산 기점) ~ 청곡사(등산로 입구) ~ 능선 안부 갈림길 ~ 성은암 갈림길 ~ 통나무 의자 쉼터(헬기장) ~ 월아산 장군대봉(정상) ~ 소정상 갈림길 ~ 편백 숲길 갈림길 ~ 돌탑 갈림길 ~ 성은암 갈림길 ~ 청곡사 늪지 ~ 청곡사 ~ 청곡사 주차장(원점회귀)
※ 대략 5km, 3시간 소요, 주차장에 먼지떨이기, 화장실 있음
교통
고속도로 남해고속도로(문산 IC) 5~10분 거리
내비게이션 → 경상남도 진주시 금산면 월아산로1440길 138(금산면 갈전리 18) 월아산 청곡사 주차장
숙식
진주 시내 다양한 식당과 호텔, 여관 등이 많음, 진주성 근처 다슬기 수제비(영래식당) 유명.
주변 볼거리
진주성, 촉석루, 진양호, 진주박물관, 남강 유등전시관, 진주중앙시장, 경상남도수목원 등.
월간산 11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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