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삼성에서 바뀌지 않은 것 [한겨레 프리즘]
이완 | 산업팀장
“우리는 더는 모바일칩 사업에서 독보적인 기여를 할 수 없습니다. 철수합시다!”
엔비디아도 실패한 적이 있었다. 최근 출간된 책 ‘젠슨 황 레볼루션’을 보면, 엔비디아는 4억달러를 투자한 모바일칩 사업을 2014년 포기했다. 엔비디아 최고경영자 젠슨 황은 곤혹스러웠던 그 상황에 대해 2023년에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독보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비전에 전념해야 합니다. 똑똑하고 성공한 사람들로서는 철수하거나 포기하는 게 쉬운 결정이 아니지만,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성공의 핵심 열쇠입니다.”
달이 차면 기우는 법. 성공한 모든 기업은 ‘성공의 역설’을 가지고 있다. 과거의 성공에 기대다 보면 시장 변화나 경쟁자 추격을 포착하지 못한 사례는 숱하게 많다.
삼성전자는 지난해 고대역폭메모리(HBM) 반도체 시장에서 패퇴하면서 위기론이 불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삼성이 금방 에스케이(SK)하이닉스를 뒤쫓을 것이란 전망이 업계에 많았다. 그런데 엔비디아의 납품 테스트를 통과했다는 소식 대신 들려온 것은 올해 5월 경계현 디에스(DS·반도체)부문장의 갑작스러운 경질이었다. 반도체 설계와 고객 서비스에 대한 이해 부족, 세부 사항까지 통제하는 ‘마이크로 매니지먼트’에 따른 복지부동, 수요를 제대로 예측 못한 미국 파운드리 공장 과잉투자 등 그동안 쌓여온 문제가 드러났다.
그런데 삼성의 선택은 ‘과거의 영광’을 되찾는 데 맞춰졌다. 퇴임 수순을 밟아가던 전영현 삼성에스디아이(SDI) 부회장이 현역으로 다시 복귀했다. 2014년부터 2017년까지 메모리사업부장을 지낸 전영현 부회장은 조직 문화를 바꾼다며 1980년대 만들어진 ‘삼성 반도체인의 신조’를 소환했다.
사실 멈춰져 있던 것은 삼성의 경영이었다. ‘관리의 삼성’은 그동안 삼성 경영을 대표하는 키워드였다. 옛 회장 비서실(이후 구조조정본부, 전략기획실, 미래전략실, 사업지원티에프(TF)로 이름이 바뀜)의 수장은 재무 출신이 맡고, 사업부문은 엔지니어 출신이 맡아 인사와 돈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것은 삼성의 성공 방식이었다.
이재용 회장도 이 방식을 그대로 따랐다. 10년 전 아버지 이건희 회장이 쓰러져 경영 주도권을 잡은 뒤에도, 그가 2017년 뇌물 제공 혐의로 유죄를 받아 경영 일선을 떠난 뒤에도, 그리고 2년 전 회장 직위에 오른 뒤에도 이 구조는 바뀐 적이 없다. 여전히 한쪽은 이학수-최지성에 이어 정현호 사업지원티에프장이 이끌고 있고, 또 한쪽은 엔지니어 출신 권오현-김기남-경계현에 이어 전영현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2014년 마이크로소프트처럼 위기를 탈출하기 위해 46살의 사티아 나델라 최고경영자를 발탁하는 깜짝 인사도 없었다. 자신이 전기차·자율주행차·커넥티드카로 바뀌는 자동차산업의 격변기를 이끌기엔 옛 세대라면서 젊은 경영자를 발탁하고 뒤로 물러난 2023년 도요다 아키오 도요타자동차 회장의 사례를 따라가지도 않았다.
이런 선택이 훗날 어떤 평가를 받을지는 알 수 없다. 아니 모르겠다. 최고경영자 후보군을 훈련하고 준비해 전세계 기업들의 주목을 받았던 제너럴일렉트릭(GE)도 세계 최고 제조업체의 자리를 내주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반도체 제국 인텔은 최고기술책임자(CTO)를 역임했던 패트릭 겔싱어를 2021년 다시 최고경영자로 데려왔지만, 파운드리 사업을 구조조정 해야 할 상황에 내몰려 있다. 다만 인텔이 엔비디아에 자리를 내주고 미 다우지수(30개 종목)에서 퇴출된 것이 연구개발 인력이 밤새워 일하지 않은 탓이란 분석은 없다.
애플 최고경영자 팀 쿡은 지난달 ‘월스트리트저널 스타일’ 유튜브에 공개된 인터뷰에서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에게서 경영에 관해 무엇을 배웠는지 질문을 받자 이렇게 말했다. “당신에게 도전하고, 당신이 갖지 못한 기술을 갖고, 그것에 자신감을 가진 최고의 사람들을 고용하라. 그리고 새로운 것이 제시될 때 내 과거 견해에 매몰돼 판단하지 않고 마음을 유연하게 바꿀 수 있는 것을 배웠다.” 세상 쉬운 말처럼 보이지만, 세상 어려운 말이다.
w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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