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부권·청문보고서 불발 최다…‘거부되거나 무시된’ 국회

이보라·민서영 기자 2024. 11. 13.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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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바디스, 윤석열 정부](5) 무너진 의회민주주의
취임 직후 연설서 ‘의회 강조’
이후 행보는 거부·적대 일관
최근 5개 정부의 거부권 33회
72.7%가 윤 정부에서 행사
국회 개원 연설에도 첫 불참
“의회와 대화 없인 국정 한계”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는 의회주의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의회주의는 국정운영의 중심이 의회라는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1주일 만인 2022년 5월16일 국회에서 추가경정예산안 시정연설과 사전환담을 하며 ‘의회주의자’임을 자부했다. 국정운영의 중심에 국회를 놓고 정부 정책은 국회와 상의해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는 지난해 4월28일 미국 상·하원 합동 회의 연설에서도 “법의 지배는 의회민주주의에 의해 뒷받침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윤 대통령 취임 후 지난 2년6개월은 의회민주주의가 퇴보한 시간으로 평가된다. 대통령 재의요구권(거부권) 행사가 급증하는 등 윤 대통령은 소통과 타협이 아닌 거부와 적대로 국회와 야당을 대했다.

윤 대통령은 취임 이후 줄곧 야당을 향한 적대적 인식을 드러냈다. 반대 진영을 비판하는 ‘편 가르기’를 국정운영의 동력으로 삼고 통합의 정치를 추구하지 않았다. 윤 대통령은 지난해 6월28일 한국자유총연맹 제69주년 창립기념행사에서 종전선언을 추진한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을 “반국가세력”으로 규정했다. 그는 지난해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공산전체주의 세력이 민주주의 운동가, 인권 운동가, 진보주의 행동가로 위장하고 야비하고 패륜적인 공작을 일삼아왔다”며 자신에게 비판적인 야당과 시민단체를 싸잡아 비판했다.

윤 대통령은 제1야당인 민주당의 이재명 대표와 취임 720일 만에 회담을 가졌다. 앞서 이 대표가 영수회담을 9차례 제안했지만, 대통령실은 그가 검찰 수사를 받는 ‘범죄 피의자’라며 회피했다. 이 대표를 원활한 국정운영을 위한 ‘정치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은 취임 열흘 만에 여야 원내대표와 회동했고,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이 각각 취임 한 달 반, 두 달 반 만에 여야 원내대표나 당대표와 만난 것과 대비된다.

‘바이든·날리면’ 발언 논란도 궤를 같이한다. 윤 대통령이 2022년 9월21일(현지시간) 미국 방문 중 박진 당시 외교부 장관에게 “(미) 국회에서 이 XX들이 승인 안 해주면 바이든이 쪽팔려서 어떡하나”라고 들리는 말을 하는 장면이 카메라에 포착됐다. 당시 대통령실은 윤 대통령의 ‘이 XX’라는 표현은 미국 의회가 아닌 야당(민주당)을 향한 것이었다고 해명했다. 문제의식 없이 야당을 손쉽게 비난의 대상으로 소환한 것이다.

윤석열 정부에서 의회민주주의 붕괴는 수치로 증명된다. 대통령 거부권 행사가 대표적이다. 국회에서 이송된 법률안에 이의를 달아 국회로 되돌려 보내는 거부권은 헌법 제53조에 규정된 대통령의 권한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거부권을 남용하면 삼권분립이 훼손될 수 있다.

12일 고민정·모경종 민주당 의원실이 국회사무처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2003년 노무현 정부부터 윤석열 정부까지 거부권은 총 33회 행사됐는데, 그중 24회(72.7%)가 윤석열 정부에서 이뤄졌다. 특히 윤 대통령은 배우자인 김건희 여사 특별검사법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가족 비리 수사를 막기 위해 거부권을 행사한 유일한 사례다.

윤 대통령은 노무현 정부 이후 국회 개원식에 불참한 유일한 대통령이다. 지난 17대 국회(2003년)부터 21대 국회(2020년)까지 당시 대통령은 모두 국회 개원식에 참석해 연설했지만, 윤 대통령은 지난 9월2일 22대 국회 개원식에 불참했다.

국회에서 인사청문보고서를 채택하지 않은 장관이 임명된 건수는 임기 절반 시점에 이미 17건으로 역대 정부보다 월등히 많다. 국회의 해임요구에도 불구하고 직을 유지하는 정부 인사도 다수다.

전문가들은 윤 대통령의 국정운영 방식이 ‘반의회주의’에 가깝다고 평가했다. 김형철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교수는 통화에서 “대의민주주의를 얘기할 때 지켜야 될 원칙들이 모두 다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교수는 윤 대통령의 잇단 거부권 행사를 들며 “국민의 대표 기관을 인정하지 않는 행태로 삼권분립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고 했다.

정진민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명예교수는 “대통령이 마음에 안 드는 법안에 대해 거부권 행사로 끝내는 게 아니라 그 전부터 의회와 활발히 대화를 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대통령이 공약을 이행하기 위해서는 대통령령 같은 행정조치로는 한계가 있다. 대부분 입법사항이기 때문”이라며 윤 대통령이 남은 임기 동안 야당과의 관계를 개선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진단했다. 야당의 협조 없이는 정부 정책을 뒷받침하는 예산 편성·입법이 어렵기 때문이다. 정 교수는 “개별 의원의 자율성이 존중돼야 하고 당정관계도 수평적으로 재정립돼야 한다. 그렇게 되면 정치적 협상 공간이 넓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윤 대통령의 남은 임기 동안 의회민주주의 위기는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임기 반환점을 돌면 레임덕(임기 말 권력누수)이 오면서 편 가르기, 적대화로 권력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더 보일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김건희 여사 등 사적 권력이 국정운영에 작용하는 것을 방지해야 하고, 그런 의미에서 야당이 주장하는 특검을 수용할 필요가 있다”며 “그래야 야당과 격의 없이 만나고 허심탄회하게 국민을 위한 논의도 할 수 있지 않겠나”라고 했다.

이보라·민서영 기자 purpl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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