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다른 승자 머스크의 등장, '세계전쟁'보다 더 예의주시할 섬뜩한 변화다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도널드 트럼프가 승리했다. 이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온 세상이 떠들썩하다. 금융위기를 비롯한 온갖 풍파에도 완강히 버티던 미국식 자유주의 질서가 마침내 막을 내렸다는 장엄한 진단이 나오는가 하면, 트럼프주의는 이미 파시즘 성격을 짙게 띠고 있으므로 이제부터는 일상적인 정치적 경쟁 따위가 아니라 파시즘에 맞서는 치열한 투쟁이 필요하다는 격문도 나돈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 속에서 정작 제대로 주목받지 못하는 중요한 현상이 있다. 그것은 이번 미국 대선의 최대 승자가 트럼프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또 다른 엄청난 승자가 있다. 바로 일론 머스크다.
머스크는 이번 대선에서 트럼프를 지지했다. 아니, 단순히 지지만 한 게 아니었다. 트럼프 후보에게 1천억 원이 넘는 엄청난 자금을 기부했을 뿐만 아니라, 트럼프 선거운동 캠프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으며 사실상 캠프의 구심 역할을 했다. 유세장 연단 위에서 마가(MAGA) 모자를 쓴 채 트럼프 주위를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세계 최대 부호의 모습은 기괴하기까지 했다.
물론 미국의 거대 자본가들은 늘 대선에 개입해왔다. 머스크만이 아니라 다른 빅테크 자본가들도 공화당, 민주당 후보들에게 막대한 자금을 기부했고, 막전막후에서 각 당 정책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머스크는 이런 통상적인 정경유착을 넘어섰다. 머스크는 트럼프주의와 자신의 사업 전망, 이해관계를 일치시키는 위험천만한 도박을 벌였고, 배팅은 보기 좋게 성공했다. 이제 머스크는 트럼프주의 이념과 운동의 또 다른 한 기둥이라 해도 좋을 위상을 확보했다.
실제로 개표 전부터, 머스크가 차기 트럼프 정부에 각료급으로 기용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자본이 주도하는 '혁신'에 대한 정부의 시대착오적 규제를 철폐하는 역할을 맡으려고 벼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머스크 스스로 이것이 트럼프 선거운동에 뛰어든 주된 동기라고 밝히기도 했다.
아무튼 우리는 과거 미국 정부들과는 달리, 정부가 단순히 빅테크 자본의 후견자 노릇을 하는 수준을 넘어 정부와 빅테크 자본이 아예 일체화하는 새로운 현실을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어쩌면 이 강력한 가능성이야말로 21세기 파시즘에 대한 성급한 진단이나 세계 전쟁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보다 더 예의주시해야 할 섬뜩한 변화일지 모른다.
21세기 봉건주의의 도래인가?
그런데 이러한 사태 전개를 마치 예언이라도 하듯이 선명히 내다본 책이 있다. 야니스 바루파키스의 <테크노퓨달리즘: 클라우드와 알고리즘을 앞세운 새로운 지배 계급의 탄생>(노정태 옮김, 21세기북스, 2024)이다.
바루파키스는 2010년대 유럽 재정위기나 좌파정치의 최근 양상에 관심 있는 이들에게는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영국에서 활동하는 그리스 출신 경제학자 바루파키스는 2015년에 출범한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정부에서 재무부장관을 맡았었다. 하지만 시리자 정부가 결국 독일을 중심으로 한 유로존 금융 세력의 압력에 굴복하자 '유럽민주주의운동2025(DiEM25)'라는 유럽 차원의 급진좌파정당을 따로 만들어 이끌었다. 그러면서 지구자본주의의 위기를 분석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저작들을 끊임없이 발표해왔다.
언론의 이목을 끄는 발언과 행동으로 유명한 바루파키스인 만큼 <테크노퓨덜리즘> 역시 사뭇 충격적인 분석과 진단을 담고 있다. 우선 제목에 눈길이 간다. '퓨덜리즘'이라고 영어를 그대로 음사했지만, 우리에게는 이미 '봉건주의[봉건제]'라는 익숙한 번역어가 있다. '테크노퓨덜리즘'이란 곧 플랫폼이니 AI니 하는 첨단 테크놀로지가 봉건제와 쌍을 이룬다는 뜻이다. 도끼나 철퇴 따위로 무장한 깡패들이 통행세나 걷고 농민들을 쥐어짜던 봉건제가 초인공지능을 향해 달려가며 화성 탐사를 목전에 둔 21세기 테크놀로지와 함께 한다니, 이게 무슨 어불성설인가.
그러나 바루파키스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빅테크 기업들이 지배하는 2024년의 지구정치경제는 이미 '자본주의'라고 할 수 없는 무엇이 됐다. 자본주의라면, 시장에서 다른 기업보다 더 많은 상품을 팔아 더 많은 이윤을 거두려는 기업들의 경쟁이 지배해야 한다. 경제학 교과서에 따르면, 이러한 경쟁은 각 기업이 더 많은 혁신을 감행하도록 만듦으로써 사회의 총생산을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실제로는 노동자와 그 가족, 소비자, 지역사회, 남반구 민중과 자연을 누가 더 많이 쥐어짜는지를 놓고 경쟁을 벌이는 게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바루파키스에 따르면, 이 모든 것이 이제는 다 옛말이 돼버렸다.
바루파키스는 빅테크 기업들에 '클라우드 자본'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래도 '자본'이라는 말이 따라붙으니 그 뿌리는 엄연히 기존 자본주의 내부의 축적 과정에 있다. 그러나 최근 몇 년 동안 미친 듯한 속도로 몰아붙이는 디지털 기술 개발을 통해 이 기업들은 '자본'이라는 규정을 벗어나는 특징을 가진 무엇으로 급속히 변질됐다.
핵심은 '클라우드 자본'이 더 이상 시장에서 경쟁을 통해 이윤을 획득해 덩치를 불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들은 더 효과적인 수단을 통해 더 어지러운 속도와 규모로 덩치를 불린다. AI로 강화된 알고리즘에 지배되면서 데이터 자원을 생산하는 네트워크를 통제함으로써 다른 모든 경제 주체에게 명령을 내리고 이들로부터 지대를 수탈한다. 가령 페이스북이나 X(구 트위터)는 온라인에서 교류하길 바라는 이용자들이 모여드는 SNS 플랫폼을 구축한 뒤에 그 가입자들이 자발적으로 업로드한 데이터를 팔아 막대한 수익을 얻거나 이 데이터를 바탕으로 전에 없던 일확천금의 사업 기회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농지 소유권을 선포하고 장원을 만든 뒤에 농민들을 장원에 몰아넣고 수확물의 상당 부분을 꼬박꼬박 챙겨간 중세 봉건 영주의 판박이다. 과거에는 농지에 금을 그었다면, 이제는 네트워크에 장원을 꾸린다. 과거에는 농업 생산물을 지대로 받아갔다면, 지금은 디지털 정보로 변환된 화폐를 지대로 거둬들인다. 그래서 바루파키스는 과감하게도, 클라우드 자본이 이제는 '자본가'라기보다는 일종의 '영주'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마땅히 농노도 있어야 한다. 바루파키스는 각종 플랫폼에 가입해 스스로 수많은 정보를 올리며 빅 데이터를 축적시켜주는 이용자들이 다름 아닌 '클라우드 농노'라 지적한다. 농노 덕분에 영주들이 권력을 누렸듯이, 수십억 명에 달하는 페이스북이나 X 이용자들이 있기에 저커버그나 머스크가 그토록 막강한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자본가와 노동자가 다 사라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기업들이 시장 경쟁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 노동자가 임금을 받아 생활비용을 충당하는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는 여전히 남아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다만 이 영역은 이제 전혀 다른 사회관계에 복속돼 그 명령을 따라야 한다. 즉, 클라우드 자본이 지배하는 봉건주의가 자본주의를 에워싸며 완전히 포섭한다. 쉽게 말하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는 여전히 존재하고 심지어는 번창할 수도 있겠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AGI(범용 인공지능) 기업들의 손아귀 아래 있는 신세다.
그럴듯하다. 2010년대 후반부터 우리가 접하는 현실, 즉 미국은 빅테크 기업들을 내세우고 중국은 국가 통제 기업들을 동원해 벌이는 디지털 기술 개발 광풍과 맞아떨어지는 설명이다. 바루파키스가 이런 분석을 통해 결국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지금의 지구정치경제가 자본주의 시장경제 예찬론 따위로 옹호될 수 있는 체제가 더 이상 아니라는 점이다. 인류의 과학기술 수준은 이미 소규모 공장주들의 경쟁 따위와는 어울릴 수 없을 정도로 발전했고, 현 체제의 최상위에 버티고 있는 국가-자본은 이런 과학기술 발전의 성과를 오히려 인간 사회를 자본주의 이전으로 회귀하게 만드는 데 써먹고 있다.
이 전망에 비춰본 머스크의 모습은 선량한 미국 유권자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힙하거나 친숙하지 않다. 바루파키스의 논의에 따른다면, 머스크는 다른 빅테크 자본가들보다 더 솔직하고 과감하게 새로운 봉건제라는 현실을 인정하고 그 활로를 열어나가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 영주들의 모든 권리가 군사적-정치적 폭력에 의존했듯이, 21세기 봉건주의에서도 클라우드 자본은 독점을 유지하고 지대를 뽑아내기 위해 강력한 국가 권력(더 정확히는 제국 권력)에 의지해야 한다. 트럼프와 머스크라는 한 쌍은 이러한 운명의 적나라한 구현이다.
빅테크 자본 - 베블런적 '깽판 놓기'의 순수한 사례
그러나 아쉽게도 <테크노퓨덜리즘>은 완성도가 그리 높은 저작은 아니다. 지구자본주의가 미친 듯이 어느 방향으로 질주하는지 시원하게 지목하기는 하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주역들과 양상들을 꼼꼼히 분석한다고 할 수는 없다. 책 자체가 상당히 산만하다. 현실사회주의가 무너진 20세기 말부터 자본주의가 마침내 자본주의 아닌 무엇, 더 사악한 무엇으로 변질된 현재에 이르기까지 역사적 과정을 훑는 전반부는 의미 있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너무 긴 서론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새로운 봉건사회의 등장을 알리는 후반부 논의가 그렇게 상세하거나 친절하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테크노퓨덜리즘'이라는 규정도 다소 선언적으로 다가온다. 분명히 방향은 제대로 가리키지만, 현실보다 너무 앞서서 결론을 내리는 것 아닌가 하는 느낌을 준다. 2024년 현재는 아직, 봉건제화라 할 만한 변화가 진행 중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새 봉건제가 완결됐다고는 할 수 없는 국면이라 봐야 하지 않을까. 그러니 머스크 같은 이가 새 시대의 전위가 되어 극우 정치에 몸소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 아닐까.
이런 점에서 바루파키스의 책을 보완할만한 저작은 프랑스 경제학자 세드릭 뒤랑(Cédric Durand)의 <실리콘밸리가 테크노퓨덜리즘의 족쇄를 풀다: 디지털 경제의 형성(How Silicon Valley Unleashed Techno-feudalism: The Making of the Digital Economy)>(Verso, 2024)이다. 영역본보다 2년 전에 나온 프랑스어판 제목은 “테크노퓨덜리즘: 디지털 경제 비판"이다.
뒤랑은 바루파키스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 극복을 모색하는 좌파 경제학자이며, 최근에는 프랑스 좌파정당들과 사회운동들의 연합인 '신인민전선(NFP)'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뒤랑의 저서 역시 제목에 '테크노퓨덜리즘'을 담고 있는데, 바루파키스는 <테크노퓨덜리즘>에서 뒤랑의 논의를 상당히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다.
그럼에도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면, 뒤랑이 빅테크 기업들의 구조와 행태를 좀 더 상세히 분석한다는 점, 그리고 이런 분석이 더욱 진전되어야만 '테크노퓨덜리즘'이라는 진단이 확정될 수 있다고 단서를 단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말하자면 뒤랑은 바루파키스처럼 빅테크 부문이 주도하는 자본주의가 자본주의 아닌 계급지배체제로 향하고 있다고 전망하지만, 바루파키스와는 달리 이미 우리가 그런 체제 안에 있다는 단정은 유보한다. 이 점에서 뒤랑의 입장은 '이윤 주도' 자본주의가 '불로소득(지대) 주도' 자본주의로 변화하고 있다는 브랫 크리스토퍼스의 신중한 진단(<불로소득 자본주의 시대>[이병천 외 옮김, 여문책, 2024]) 쪽에 더 가깝다.
뒤랑의 책에서 특히 이목을 끄는 것은 교과서 속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행위자와는 전혀 다른 빅테크 기업들의 행동양식을 설명하기 위해 소스타인 베블런의 자본 이론을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뒤랑도 바루파키스처럼 봉건 영주의 사례를 끌어들여 빅테크 기업들을 설명하지만, 이 수준에 그치지는 않는다. 이 대목에서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바로, 19세기 말-20세기 초 미국에 독점자본주의가 자리 잡을 무렵에 베블런이 제시한 독점자본 이론이다.
벌써 이때부터 베블런이 보기에 거대 자본의 실상은 시장 경쟁을 통해 이윤을 획득하고 축적을 전개한다는 이론과 거리가 멀었다. 베블런에 따르면, 시장 지배력을 확보한 대자본은 혁신 경쟁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이윤을 확보할 수 있는 선에서 혁신을 제한한다. 혁신의 결과를 사회의 다른 부분이 활용하지 못하도록 막고, 혁신의 잠재력이 기업의 이해와 충돌하는 방향으로 전개되지 못하도록 제어한다. 즉, 생산 역량의 증대를 통해 이윤을 얻는 게 아니라 그 철저한 통제를 통해 이윤을 챙긴다. 베블런은 이런 행태를 '사보타지'라 불렀고, 베블런 사상을 우리말로 소개해온 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 소장은 이를 '깽판 놓기'라 옮겼다(<자본의 본성에 관하여 외>, 책세상, 2009).
사실 100년 전 독점자본주의만 해도 과연 베블런이 제시한 '깽판 놓기'로 설명될 수 있는지 따져봐야 할 구석이 많았다. 하지만 100년 뒤인 지금은 이야기가 달라졌다. 마치 21세기 상황을 위해 준비됐던 이론인 것처럼, 빅테크 기업들의 행태는 베블런의 '깽판 놓기'론에 딱 들어맞는다. 뒤랑은 이 점을 강조한다. 빅테크 기업들은 인류의 커먼즈인 데이터를 사적으로 전유하고 네트워크에 영리형 플랫폼을 구축해 지대수익을 누림으로써 디지털 사회의 풍부한 가능성을 (발전시키는 게 아니라) 통제한다. 머스크, 저커버그, 베이조스는 '기술 진보'가 아니라 '깽판 놓기'의 화신들이다.
이렇게 '깽판 놓기'를 통해 사회의 다른 부문을 '포식'하는 빅테크 자본은 이제까지 존재해온 어떤 독점자본보다 더 무시무시한 위력을 지닌 것처럼 보인다. 현란한 전주곡을 지루하게 이어가며 등장을 예고하는 초인공지능은 이런 위세를 완성하기 위한 마지막 장신구다. 그러나 마르크스나 베블런이 권고한 '뒤집어 보기' 접근법을 통해 다시 바라보면, 이들의 토대가 의외로 취약함이 드러난다. 디지털 경제의 토대에 자리한 모든 테크놀로지는 본래부터 강한 사회적 성격을 전제하며, 따라서 이런 '사회적' 기술을 '사적'으로 전유하려면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강압적/설득적 권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머스크가 감행한 '성공한' 도박은 이런 역설적 진실을 민감하게 이해한 자의 선택이었다. 지난 십 수 년 동안 지구자본주의의 마지막 희망으로 급속히 성장한 빅테크 자본이 '자신의 형상대로' 세상을 재구축하기 위해 남겨둔 마지막 한 가지 숙제는 국가(제국) 권력과 완전히 한 몸이 되는 것임을 머스크는 명철히 이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가 마주하게 될 것은 어쩌면 테크노퓨덜리즘이 아니라 현대의 예언자 루이스 멈퍼드가 '거대 기계'라 일컬은 것의 완성일지 모른다(<기계의 신화> 1, 2권).
[장석준 출판&연구집단 산현재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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