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린 풍경] 백마강 건너 또 하나의 백제… 새 이야기를 '부여'하다
결국 흩뿌리는 비가 발목을 잡았다. 지난달 18일 뜨거운 불기운을 가득 채운 열기구가 부여 상류 금강 수변공원에서 두둥실 떠올랐다. 한껏 넓어진 강줄기 좌우로 나직한 산과 마을, 농지가 광활하게 펼쳐졌다. 붓질을 하듯 선명하게 휘어진 물줄기는 하류로 갈수록 흐릿해져 아슴푸레하게 사라졌다. 계획대로라면 1시간가량 강줄기를 따라 내려가며 부여와 주변 풍광을 두루 조망할 참이었는데, 부소산성을 코앞에 두고 약 5분 만에 비행은 종료됐다. 탄성은 짧고 여운은 길었다.
백마강 건너 '엿바위마을' 엿보기
부여 일대를 흐르는 금강을 지역에서는 백마강이라 부른다.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백마 머리를 미끼로 강물에서 백제 무왕의 화신인 청룡을 낚아 올렸다는 전설에서 유래를 찾는다. 그보다 160여 년 전인 무령왕 시대에도 금강을 ‘백강(白江)’으로 표기했다. 말(馬)은 크다는 의미로도 쓰였다. 백마강은 곧 ‘백제에서 가장 큰 강’이다.
부여 여행은 대개 부소산성을 중심으로 한 백마강 동쪽에 치우쳐 있다. 왕릉원과 정림사지, 궁남지 등 이름난 관광지가 모두 강 동쪽에 위치한다. 부여 백제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강 서쪽도 최근 들어 조금씩 주목받고 있다. 규암마을이 대표적이다.
읍내에서 백제교를 건너면 바로 규암면 소재지다. 다리 건너 왼편 바위 언덕에 수북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규암(窺岩)은 수북정이 올라선 바위로 마을에선 ‘엿바위’라 부른다. 강으로 돌출된 모양이 어딘가를 슬쩍 엿보는 모습이라 붙인 명칭이다.
수북정은 조선 광해군 때 양주목사 김흥국이 자신의 호를 따서 지었다. 바로 아래에 백마강이 부드럽게 흐르고 그 너머로 부소산성 일대가 그윽하게 조망된다. 수북정 아래 바위는 자온대(自溫臺)라고도 부른다. 백제시대 왕이 강 상류 왕흥사에 행차할 때 거쳐가곤 했는데, 그때마다 바위가 저절로 따뜻해졌다고 한다.
수북정 바로 아래 강둑에 백마강가(白馬江歌) 시비가 세워져 있다. “소상강은 어디인가, 동정호와 어떠한가. 파란 물 맑은 모래에 강가에는 푸른 이끼, 소주의 십리 연못이 이만한가 아닌가. 소동파의 적벽 놀이 그때와 다르겠나. 어와 아이들아 배 몰아 저어가자.” 조선 인조 때 문신 황일호가 벼슬살이를 마치고 귀향해 읊은 노래다. 백마강 기슭의 호젓한 풍광이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강둑에서 내려서면 바로 규암마을(엿바위마을)이다. 과거 나루터와 오일장을 중심으로 부여읍내 못지않게 번성했던 곳이다. 1968년 백제교가 놓이기 전에는 뱃길을 연결하는 시외버스정류장이 있었고, 버스를 실어 나르는 ‘차배’도 운영됐다고 한다. 오가는 사람이 많으니 이들을 상대하던 술집이 64개나 있었고, 종업원 수가 100명이 넘었다고 한다. 부여 최초로 극장과 백화점이 들어섰던 곳도 규암마을이었다.
그렇게 흥청거렸던 장터에서 사람이 떠나고 빈집과 상가는 세월에 곰삭아 갔는데, 2017년부터 공예가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조금씩 변모해가고 있다. 허름한 외관 그대로의 건물에 카페, 갤러리, 공방 등이 들어서며 하나씩 새살이 돋고 있다.
마을 어귀에 '선화핸즈' 간판을 단 빛바랜 단층 건물이 보인다. 허술함을 겨우 가린 페인트며 황토색 미닫이 문짝을 보면 선뜻 들어서기가 주저된다. 이런 마음을 간파한 듯 입구에 친절하게 ‘일단 들어오세요’라는 입간판을 세워 놓았다.
디자이너 최정민 사장이 반갑게 맞는다. 외부와 달리 정갈한 판매대에 갖가지 기념품이 작품처럼 전시돼 있다. 자개로 수를 놓고 전통 매듭으로 마감한 키링, 쇠로 만든 작은 풍경(종), 나비 문양 열쇠고리 등이 고풍스러우면서도 세련되다. 최 사장은 디자인의 대부분은 부여백제박물관에 전시된 유물에서 영감을 얻는다고 했다. 특히 “금동대향로는 무한한 상상의 파노라마를 펼치게 하는 멋진 보물”이라고 했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물건이 아니기에 이곳에서만 살 수 있는 가장 ‘부여다운’ 기념품이다.
건물 외벽에 ‘식당’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다. 옛날 ‘장미식당’의 흔적이다. 최 사장은 이 집의 역사도 소중한 자산이라 여긴다. 한옥 창틀을 테이블로 활용한 장식장 안에 빛바랜 편지가 전시돼 있다. ‘녹음방초 한결 푸르고’로 시작하는 ‘누님 전에 올림’ 편지, ‘조용히 깊어 가는 이 밤을 외로움 달래려고 펜을 잡읍니다’라는 연애편지가 함께 놓여 있다. 집 안을 정리하다 발견한 것들이다. “지금과 다른 맞춤법이 우습기도 하고 20대 여성의 풋사랑이 엿보여 제가 다 설레요.”
시간이 나면 최 사장은 대형 보자기에 직접 그린 지도를 펼쳐 놓고 게임 형식을 빌려 손님들에게 마을을 소개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수북정처럼 골목마다 볼거리가 수북하다. 카페가 된 요정, 레스토랑으로 변신한 양조장, 서점이 된 떡집 등이 곳곳에 숨어 있다. 외관은 옛날 그대로여서 잘 살펴야 보인다.
선화핸즈 바로 아래에 ‘수월옥’ 카페가 있다. 스러질 듯 낡은 나무 기둥에 엉성한 양철지붕, 그 앞에 억새까지 수북하게 자랐으니 영락없는 폐가인데, 내부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다. 일명 ‘방석집’이었던 내부는 기둥을 트고 식탁 대신 옛날 소반을 놓았다. 둥그런 갓 전등 아래서 우아하게 차를 마시는 새로운 ‘방석집’이다. 잡초처럼 보이던 창밖 억새는 외부 시선을 차단함과 동시에 말쑥한 정원 풍경을 연출한다.
마을 한가운데에 위치한 ‘스튜디오 부여’ 역시 ‘은풍옥’ 술집이 갤러리로 변신한 경우다. 전시 공간을 찾기 어려운 지역 예술인들의 작품을 주로 선보인다. 마을 위쪽에 ‘자온양조장’이 있다. 입구에 헌 자전거 한 대가 놓였고 잡풀이 무성해 문 닫은 양조장인가 싶은데, 내부는 고급스런 레스토랑이다. 벽면에 버려진 자개농 문짝이 작품으로 걸려 있고, 식당에서 곁들이는 전국의 유명 전통주가 나열돼 있다. 창밖으로는 아직 손대지 않은 양조장의 옛모습에 시간이 쌓여간다.
올해 스물셋, 고등학교 친구인 고예은과 천지영씨가 지난달 17일 ‘붕어빵 붕붕붕’ 간판을 걸고 영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책방과 공방이 붙어 있는 슬레이트 건물이다. 밴드 활동을 하는 둘은 스무 살 때 1년 동안 ‘부여살이’ 왔다가 규암마을의 매력에 빠져 자꾸 기웃거리게 됐다고 한다. 이를테면 ‘엿바위마을’ 엿보기에 흠뻑 빠져, 활동을 잠시 중단한 올겨울 붕어빵 장사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집주인도 청년들의 용기가 가상했는지 거의 전기세만 받는 수준에서 가게를 6개월 임대해 주었다. 한철 장사지만 ‘시골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어릴 적 소망을 이룰 수 있어 설렌다고 했다. 풋풋한 두 청년의 미소가 화석처럼 낡아가는 마을에 생기를 불어넣는 듯하다.
사라진 백제 복원한 백제문화단지
규암마을에서 강 상류로 걷기 여행길 ‘백마강길’이 이어진다. 읍내 쪽 강변 산책로에 비하면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걷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해발 100m 내외의 고만고만한 산자락에 마을과 들판이 자리 잡은 모양새라 지형이 위압적이지 않고 푸근하다. 이 평화로운 풍경 속에 500년 된 매화가 향기를 풍긴다는 부산서원, 문헌에만 전하는 백제 사찰 왕흥사지, 백제시대에 재상을 선출하고 중요한 국사를 논의했다는 천정대 등의 유적이 흩어져 있다.
대개 이야기로만 듣고 실제 가는 사람은 거의 없는데, 중간쯤의 백제문화단지에는 연중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실체가 사라진 사비백제의 왕궁과 사찰을 재현해 놓아 부여의 옛 모습을 간접적으로 유추하고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백제 왕궁인 사비궁과 대표 사찰인 능사, 계층별 주거 문화를 재현한 생활문화마을, 백제 개국 초기 궁성인 위례성이 차례로 나타난다. 입구의 백제역사문화관과 함께 1,500년 전 문화대국 백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매주 금·토·일요일에는 야간에도 개장해 은은한 백제의 정취를 즐길 수 있다. 다만 오래된 건물이 아니어서 옛 궁궐이나 사찰에서 풍기는 고풍스러움은 느껴지지 않는다.
부여의 명물 백마강 수륙양용버스(주말 기준 성인 2만9,000원)가 출발하는 장소도 백제문화단지 주차장이다. 이곳에서 출발한 버스는 백마강레저파크로 이동해 물위로 진입한다. 고란사와 낙화암 아래를 돌아 강을 거슬러 천정대 부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데에 약 40분이 걸린다. 뭍에서 강으로 진입한 버스는 좌우 균형을 맞추기 위해 잠시 주춤거리다가 부드럽게 물살을 가른다. 내부는 버스 그대로인데 차창 밖엔 강물이 일렁거린다. 앉은자리에서 그대로 뱃놀이를 즐기는 신기한 경험이다.
공중에서 부여의 풍광을 즐기는 열기구 체험(성인 기준 주중 18만 원, 주말 21만 원) 집결지도 백마강레저파크다. 실제 열기구가 떠오르는 장소는 당일 바람 방향에 따라 달라진다.
부여=글·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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