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도한 ‘트럼프 포비아’... 1기 땐 코스피 3000 넘었다
미 대통령 당선인인 도널드 트럼프가 처음 대통령으로 선출됐던 2016년 11월 8일 독일 일간지 디 벨트는 1면 톱 기사로 영화 ‘지옥의 묵시록’ 포스터에 트럼프 얼굴을 새기고, 영화의 원제 ‘지금, 세상의 종말(아포칼립스 나우)’이라고 썼다. 도이체방크는 “트럼프가 당선되면 유럽 증시가 10% 폭락할 수 있다”고 했다. 시티은행은 “트럼프 당선 시 뉴욕 증시에서 S&P500 지수가 곧장 3~5% 급락할 것”이라고 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시절 백악관 예산관리국을 맡았던 데이비드 스톡먼은 CNBC에 출연해 “트럼프가 되면 시장이 폭락한다. 모든 걸 팔라(Sell everything)”고 했다.
하지만 상황은 반대로 흘러갔다. 트럼프 당선이 확정된 다음 날(11월 9일) 뉴욕 증시 3대 지수는 모두 1% 이상 상승했다. 트럼프 1기 동안 다우평균은 코로나 사태를 겪었음에도 55% 올랐다. 한국 코스피도 몇 년간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박스피’ 오명을 벗고 트럼프 4년 동안 50% 이상 상승하며 3100선을 돌파했다. 같은 기간 중국 상하이종합지수와 독일 DAX지수도 각각 15%, 18% 올랐다.
◇트럼프 1기 때 교역량 늘어
내년 출범하는 트럼프 2기를 앞두고 국내 금융시장은 트럼프 1기 출범 때와 비슷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트럼프가 미국에 수입되는 모든 물품에 보편관세 10~20%를 부과하고, 중국에는 관세율을 60% 이상으로 올린다는 공약으로 재무장했기 때문이다. 국책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KDI)은 12일 발표한 ‘경제전망’에서 내년 수출 증가세가 2.1%로 예상돼, 올해(7%)의 3분의 1에 그칠 것이란 비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KDI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으로 통상 환경이 악화하는 등 세계 경제에 하방 위험이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고 했다. KDI는 내년 성장률 전망치를 8월 전망 때보다 0.1%포인트 낮춘 2%로 조정했다. 올해 성장률 전망치도 2.5%에서 2.2%로 낮췄다.
하지만 트럼프 1기 경험을 복기해보면 과도한 공포감을 피해야 한다는 지적이 많다. 세계무역기구에 따르면 트럼프 1기 마지막 해인 2020년 글로벌 수출량은 17조6496억달러로, 오바마 정부 마지막 해(16조502억달러)보다 10% 늘었다. ‘관세 전쟁’을 주장했던 트럼프 1기 때 미국이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던 것이다. 4년 동안 미국이 글로벌 국가들로부터 수입한 금액은 7% 늘었다. 미국과 중국 간 격화한 무역 갈등으로 중국의 대미 수출액은 7% 줄었지만, 그 사이 한국의 대미 수출은 12% 늘었다.
트럼프 1기 때 고율의 대중국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했지만, 미국의 2019년 기준 연간 관세율은 2.85%로 EU(3%)보다 낮았다. 대중 관세를 뺀 미국의 평균 관세(1.3%)는 오바마 정부(1.5%) 수준을 밑돌았다. 주원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실장은 “트럼프 2기가 한국 경제에 마이너스 요인도 있겠지만, 1기 때의 경험이 있고 그동안 한국의 대중 교역이 줄어든 만큼 과하게 불안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
◇반도체 지형 변화는 유의해야
다만 트럼프 1기 때와 다른 산업지형의 변화는 고려해야 할 변수다. 트럼프 공약대로 인플레이션 감축법(IRA)과 반도체 지원법(칩스법)이 폐지될 경우 대미 수출이 감소할 수 있는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12일 코스피의 2500선 붕괴를 이끈 것은 삼성전자(3.64% 하락)였다. 이날 일본 정부가 반도체와 인공지능(AI) 분야에 10조엔(약 90조원)을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자, 삼성전자에 대한 외국인 매도세가 거세졌다. 가뜩이나 중국 업체의 추격에 최근 삼성전자가 3분기 실적 설명회에서 일부 D램(구형) 반도체의 ‘생산량 조절’을 언급하는 등 공개적인 감산 계획을 내비치는 상황에서 일본 기업들까지 본격 참전하면 한국 반도체 업체 수익성이 훼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안동현 서울대 교수는 “경기 반등 시점을 거시경제 전문가보다 반도체 전문가에게 물어보는 것이 나을 만큼 한국 경제의 반도체 의존도가 높다”고 했다. 트럼프의 정책에 따라 한국 전체 수출의 18%, 코스피 전체 시가총액의 15% 이상을 차지하는 삼성전자와 같은 반도체 기업의 실적과 주가가 출렁이면서 국내 전체 시장이 타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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